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소년공원 2011.10.27 11:20 조회 수 : 2406

십 수년 전에 서울대 법학과에 합격한 만학도가 출판한 책의 제목이다.

불우한 집안환경과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막노동이나 배달 일을 하다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한민국에서 제일 훌륭하다는 대학에 입학하게 된 이야기를 쓴 책이었는데,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세상풍파를 다 거치고나니 공부에 대한 진정한 욕심이 생기고, 저절로 공부가 잘 되더란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누군가 내게 어찌 그리 공부를 많이 했느냐, 혹은 말이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마친것도 용한데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런 말을 할 때면 내 마음속으로 하는 혼잣말도 이렇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며칠 전에 서울의 한 구립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어린이를 폭행에 가까운 체벌을 하는 장면이 뉴스에 보도되어서 아직까지도 다음 아고라 같은 온라인 여론이 시끌시끌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이집 교사의 박봉과 열악한 근무여건을 거론하며, 교사도 인간인 이상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꽃으로라도 어린이를 때리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보호해야할 사람이 아무리 힘들다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전직 어린이집 교사로서 나는 양쪽 의견 모두에 동의한다.

그 어떤 상황하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어린 아이를 때리면 안된다.

그리고, 그 보호받아 마땅한 어린이를 부모를 대신해서 지켜주고 가르치는 어린이집 교사들은 마땅히 상응하는 처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나처럼 기회를 잘 잡아서 어린이집 이라는 곳을 탈출하는 교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사들은 몸을 상하고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마음을 상하면서 버티고 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5년여 동안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로 일을 했었다.

혹자는, 밝고 해맑은 어린이들과 하루종일 함께 하는 일이니 얼마나 행복한 직업이냐고 순진무구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유아기 어린이를 수십 명 모아놓고 교육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땅에 홀홀단신으로 날아와서 영어로 대학원 강의를 듣고, 영어로 강의를 하고, 영어로 논문을 쓰고, 마침내 미국 대학의 교수가, 그것도 테뉴어를 받은 종신 교수가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종일반 어린이집 교사를 하던 일에 비하면 훨씬 쉽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점심밥을 나혼자 조용히 천천히 먹을 수 있었고, 화장실을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퇴근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하루에도 수 십 번 이상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었고, 행사준비를 위해서 무거운 가구와 짐을 나를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어디 가서 어린이집 선생이라고 하면 아이보는 보모 대접을 받던 것이,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고 하면 존경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실제로 어린이집 교사로서 받던 월급보다도 대학원생 조교 월급이 훨씬 더 많았다 (교수가 된 이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와서 공부를 마치고 교수가 되었다.


지지난 주에 코난군네 어린이집에서 호박농장으로 견학을 다녀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학부모는 함께 가도 된다고 하길래 코난군 아범이 사진도 찍어줄 겸, 수고하시는 선생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겸 해서 따라갔었다. 반 아이들 열 여섯 명 중에 절반 정도는 학부모가 따라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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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룸 어린이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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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부쩍 용감해진 코난군이 제 키보다 높은 건초더미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다.


그날 저녁, 코난군 아범은 "이상하게도 피곤하다"면서 일찍 잠을 자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말하기를, "견학에 따라가서 달리 힘쓸 일은 없었지만 그렇게 많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온 것 같다"고 했다.

40대의 건강한 중년이 피로를 느끼는 일을 20대 여자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방학도 없이 하루종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 어린이집 교사들의 현실인 것이다.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보다 더 힘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그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



2011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