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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간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 없이 연달아 보았던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

스페인어로 원래의 제목이 종이의 집 (casa는 집, papel은 종이 라는 뜻) 인데 미국에서는 금전강도 라는 뜻으로 Money Heist 라고 제목을 붙였다.

처음 이 드라마를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연예계 기사 중에 배우 유지태가 한국판 종이의 집 드라마에 주연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본 것이 계기였다.

그 기사 아래에 미국 교포 아줌마들이 (기사를 본 것이 미씨유에스에이 사이트였음) 유지태가 교수역에 어울리겠다 아니다 갑론을박 토론을 하기도 하고, 또 무슨 배역은 배우 누구가 제격이라는 둥, 무슨 배역은 누가 맡아야 한다는 둥, 말이 많길래 어떤 드라마인가 하고 더 검색을 해보다가 넷플릭스에서 에피소드 1편 부터 시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름도 성도 알려지지 않은 자칭 "교수"라 불리우는 범죄계획의 천재가 여덟 명의 공범을 모집해서 외딴 별장에서 합숙을 하며 완전범죄를 위한 강의와 훈련을 몇 달간 한 다음, 마침내 스페인 조폐국을 습격해서 24억 유로를 직접 찍어내서 탈출하는 강도질에 성공한다는 스토리이다.

만약의 경우 범죄가 실패하거나 경찰에 잡혔을 때 서로를 고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강도범들은 실명을 알리지 않고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 이름으로 닉네임을 정해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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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쿄, 나이로비, 덴버, 리오, 베를린, 헬싱키, 오슬로, 모스크바... 는 파트 1과 2 (시즌 1 이라 할 수   있음) 에서 강도짓을 벌인 일당의 이름이고, 파트 3과 4 (다음 강도짓을 벌이는 시즌 2) 에는 오슬로와 모스크바가 빠지고 스톡홀름, 리스본, 등의 인물이 추가된다.

 

이 드라마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먼저 교수와 경찰간의 기발한 두뇌싸움이 흥미진진한 점이다.

강도들은 얼굴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같은 옷, 빨간색의 점프수트를 입고 살바도르 달리의 우스꽝스런 얼굴 모양 가면을 썼는데, 인질로 잡은 사람들에게도 미리 준비해간 똑같은 옷과 가면을 착용하게 해서, 저격수가 함부로 총을 쏠 수 없게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경찰측에서 같은 옷과 가면을 구해서 경찰에게 입히고 몰래 건물 안으로 잠입하려고 했다.

아, 이제 강도들은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가! 하고 마음을 졸이지만, 머리가 좋은 교수는 이미 그런   상황을 짐작하고 가면을 뭉크의 절규 가면으로 바꿔 쓰도록 했다.

달리의 가면을 쓴 경찰은 당황하며 얼른 후퇴했다.

이런 식으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업치락 뒤치락 하면서 머리싸움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다음은 입체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역동적인 관계 발전이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부자지간인 모스크바와 덴버가 서로에게 투덜대다가, 마음 찡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다가, 엄마와    헤어지게 된 계기를 알게 되면서 증오하게 되다가, 마침내 화해하지만 아버지인 모스크바가 경찰의 총을 맞고 죽게 되는데, 그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관계의 진전을 함께 따라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토쿄와 리오는 범죄 현장에서 로맨스를 불태우지만, 불같은 성격의 토쿄는 여러 번 사고를 치고 리오는 그 장단을 맞춰주다가 범행이 실패할 뻔하는 위기를 겪기도 한다.

강도인 덴버는 인질인 모니카와 사랑에 빠지지만, 나중에는 그 사랑이 스톡홀름 신드롬이냐 아니냐를 두고 다투기도 한다.

나중에 파트 3과 4 에서 모니카는 스톡홀름 이라는 닉네임으로 강도단에 합류하게 된다 :-)

여전사 스타일의 나이로비와 싸이코패스 같은 베를린이 다투기도 하고, 헬싱키와 나이로비가 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관계가 왔다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인 관계의 발전은 교수와 인질협상 전문 형사 라켈 사이에서 일어난다.

처음에는 우연을 가장해서 교수가 라켈에게 접근하고 그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강도질에 활용하지만, 나중에는 두 사람이 정말로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막판에 라켈은 교수가 강도단의 두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척 분노하고 당혹스러워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파트 3-4에서 리스본 이라는 닉네임으로 강도단에 합류한다.

형사가 강도단 두목과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함께 강도질을 하다니... 

너무 심하게 말이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게 바로 이 드라마의 묘미이다.

 

형사 라켈이 강도단을 돕게 되는 파트 2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대사를 말한다.

교통사고로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친한 동료가 왜 교수가 은신하고 있는 곳을 윗선에 알리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라켈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제 더이상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그래"

라고 한다.

그게 바로 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상식적으로 은행강도는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해치는 나쁜 사람들이 맞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빌빌대는 백수이거나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찌질하고 한심한 사람들이 교수의 지휘 아래 모여서, 인질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서, 남의 돈을 뺏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직접 인쇄해서 가지고 나오는 것이 강도질의 목표이다.

교수의 말을 빌자면, 양적완화 라는 명목으로 수백, 수천억 유로의 화폐를 마구 찍어내는 정부와    유럽연합은 나쁘지 않고, 찌질이 몇 명이 뭉쳐서 아무도 해치지 않고 고작 24억 유로를 찍어내서    가지고 달아나는 것은 그렇게도 나쁜 일이냐고 묻는다.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강도단을 응원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이 경찰에게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청하기 때문에 경찰과 교수의 두뇌싸움이 더욱더 흥미진진하게 여겨진다.

보통의 경우 범죄자는 경찰에게 잡히고 벌을 받는 것이 흔하고도 마땅한 결말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범죄자가 범죄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무의식속의 죄책감이 더해져서 재미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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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영어 더빙이 있는줄 모르고 스페인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 나오는 것으로 드라마를 거의   막판까지 보다가 나중에서야 영어 더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막 읽으랴 화면 따라가랴 바빠서 무척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다가 영어 더빙을 틀고 시청을 하니  집중을 덜해도 되서 편하기는 하지만, 원래 배우의 목소리와 말투가 느껴지지 않아서 생동감이 덜했다.

그래서 다시 스페인어로 대사를 하는 원래 버전으로 보았다.

스페인어는 몰라도, 교수의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 나이로비의 카랑카랑하고 동유럽 액센트가 섞인 듯한 말투, 덴버의 한없이 멍청한 웃음소리, 베를린의 사이코패스 같은 대사 톤... 등을 느낄 수 있어서 훨씬 더 좋았다.

 

 

2020년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