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어린이집 교실에 코난군을 들여보내고 나오려하는데 코난군이 자기 미술작품 폴더 안에 들어있던 봉투 하나를 꺼내서 전해주었다.
이게 뭘까? 궁금해 하며 열어보려는데, 코난군이 내 손을 꼭 잡고 봉투를 열지 못하게 하면서, “집에 가서 오픈하면 돼, 오케이?” 라고 말했다.
꼼꼼하게 스카치테잎으로 봉한 편지봉투
코난군의 꼼꼼한 성격이 묻어난다.
아마도 한국어만 하는 어린이였다면, “집에 가서 열어봐, 알았지?” 라고 말했을 것이고, 영어만 하는 어린이였다면, “You can open it at home, okay?” 라고 했겠지.
그러고보니 위의 문장을 한국어와 영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느껴진다. 한국어 문장은 명령문이 되고, 영어 문장은 평서문을 가장한 간접적인 부탁이 된다. 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이 더 잘 알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의 짐작으로는 두 문화의 차이가 언어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쓸모없는 반송봉투를 아이들의 쓰기 활동에 재활용하라고 놔둔 레드룸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교육방식 (invisible curriculum) 이 제대로 가치를 발휘했다.
도대체 이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출근해서 봉투를 열어보니 잘 접은 편지가 들어있다.
잘 접은 편지지도 코난군의 차분한 손놀림을 보여준다.
뭐라고 쓴 것일까?
요즘 코난군은 그림도 곧잘 그리고 글씨처럼 무언가를 휘갈겨 쓰는 시늉도 잘 한다. 여기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한다거나, 똑바른 선을 이용해서 사물을 곧이곧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표상하고자 (represent) 하는 사물/사람이나 장면을 어떤 방법으로든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설명은 복잡하지만, 쉽게 예를 들자면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형상 두 개를 붙어있도록 그려놓고 “아빠와 코난군이 씨름하며 노는 장면” 이라고 묘사하는 것이다. 아빠는 큰 사람, 자신은 작은 사람이니, 머리에서 손발이 뻗어나오는 원시적인 형태의 사람일망정, 크기에 차이를 두어 누가 아빠이고 누가 코난군인지 구분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둘이 딱 붙어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신체를 부딪히며 뒹굴고 노는 장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아니다. 유치원기 어린이들은 아직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대신, 이렇게 대체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고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견했다.
이런 그들만의 표현법을 장려해주는 것이 바로 수많은 매체와 책장수들이 말하는 “창의력 개발”의 지름길이다.
물론, 읽기와 쓰기에 대한 관심과 흥미도 가지게 해주어서, 또다른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도 이 시기에 참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코난군의 편지에 이렇게 답장을 썼다.
앞으로 이런 편지를 자주 주고받게 될 것 같으니, 시작부터 진을 빼지 않도록 짧게 썼다.
오늘 아침 내가 두근거리며 봉투를 열었던 기쁨과, 편지지를 펼쳤을 때의 즐거움을 코난군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잘 접어서 봉투에 넣고 봉했다.
오늘 저녁에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코난군에게 전해주어야지.
아이가 자라서 내 전공분야의 나이가 되니, 하루하루 아이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더욱 재미있다.
2012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