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름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동료교수네 아이들의 수학 학습 정도를 평가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써본다.
어제 그냥 일기 글에서도 썼지만, 미국 어린이들은 일상 생활에서 수개념을 습득하고 연습할 기회가 제한적이다. 구멍가게에 돈을 가지고 가서 직접 물건을 살 수가 없고, 새 해가 되면 온국민이 동시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 시스템이 아니다보니, “몇살이니?” 하는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할 수가 없고, 1월 2월 3월 하는 대신에 재뉴어리 페뷰어리 하면서 달마다 다른 이름을 외워야 하는 등, 일상 생활에서 숫자와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
1. 돈을 사용할 기회가 없는 생활
일단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집을 벗어나야 하니, 아이 혼자서 가게에 갈 수가 없다. 혹시라도 초등학생 연령의 아이가 혼자서 찻길을 따라 걷고 있다면 당장에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다. 아동방치를 한 보호자에게 법적처벌이 내려지는 것은 다음 수순이다.
아이가 부모와 함께 가게에 가더라도 어른이 돈을 사용하는 것조차 구경하기가 힘들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현금을 주고 받는 것을 볼 기회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미국에서는 신용카드가 일반화 되기 전에도 개인 수표를 현금보다 많이 사용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역사적 전통적으로 미국 아이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어른들이 거스름돈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볼 기회가 현저히 적었다. 개인 수표는 지불해야할 돈의 총액을 적어서 서명을 하고 그 페이지를 뜯어서 내는 것이라, 한국의 자기앞수표 처럼 거스름돈을 받을 일이 전혀 없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였는데, 같은 반 친구 중에 집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아이가 있었다. 나와 많이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 집에 놀러가면 넓은 가게방에 여러 명이 모여 놀 수 있기 때문에 가끔 무리를 지어 놀러가곤 했었다. 그 친구네 부모님은 다른 일로 바쁘셨던지, 아이에게 가게를 보라고 맡겨놓고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가게방에 앉아서 함께 놀다가도 손님이 오면 그 친구는 능숙하게 물건을 고른 손님에게 가격을 말해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곤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 가게는 아이들 군것질거리나 소주 막걸리 같은 것을 함께 팔던 곳이었는데, 간판도 없는 영세한 규모의 가게라, 물건마다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고, ‘이거 얼만교?’ 라고 물으면 ‘이시번’ 하고 말해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다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였지만, 모든 물건의 가격을 기억하고, 백원을 받고 80원 잔돈을 거슬러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정도로 훌륭한 점원이었다. 사실, 그 친구 뿐만 아니라 가게방에 모여 놀던 우리들 모두는 그정도의 돈계산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쉽게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80년대 부산의 산동네 아이들의 셈 실력은 그 정도였다 🙂
그런데 우리집 코난군도 그렇고, 어제 평가한 데비네 두 아이들도 가게놀이를 하면서 거스름돈을 계산하게 했더니, 계산은 커녕 거스름돈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아이들의 지능은 정상범위이며, 아빠 엄마가 대학교수인 중산층 가정에서 잘 교육받은 아이들이다. 만으로 일곱 살, 한국에서 세는 나이로는 아홉살이니, 가게를 보던 내 어릴 적 친구와 비슷한 나이이다. 신체발달이나 영양섭취 상태도 그렇고, 교육적인 경험 여부를 따져보아도, 1980년의 가게보던 내 친구와 2015년 이 아이들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어느 모로 따져봐도 부족할 것이 없는 이 아이들이, 2달러를 건내면서 이 물건은 1달러 62센트야. 그러니 거스름돈을 줘! 하고 시켜보니, 손가락을 접었다 펼쳤다 한참을 고심하거나 (코난군), 아니면 받은 1달러 지폐 두 개 중에 한 개를 선뜻 돌려주고 거기에다 62센트 동전을 더 얹어서 돌려주는 (올리비아) 행동을 보였다. ㅋㅋㅋ
2. 가장 먼저 시작하는 수세기, 나이가 어렵다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이라는 나이를 먹는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살았던 것을 나이로 쳐서 그렇게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암튼,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먹기 시작하는 나이는, 해가 바뀌면 일괄적으로 한 살을 더 먹으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거의 매일 매 순간 인식하고 활용할 중요한 정보가 된다.
즉, 유치원이나 학교 교실에서 모든 반친구들은 같은 나이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몇 살인지 물어보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호칭을 적절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예쁜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이구, 예뻐라, 몇 살?” 하는 질문이다. 그러면 아직 말도 채 못배운 어린 아기라 하더라도 꼬물꼬물 손가락을 펼쳐서 세 살, 네 살, 하고 대답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몇살이니? 하고 묻는 질문 자체를 많이 하지 않는다. 존댓말이나 호칭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나이가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나이를 묻게 되어도 저마다 대답이 다르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몇살이니? 하고 물으면 한국이라면 모든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모아 여덟살이요! 하고 대답하겠지만, 미국 교실에서는 어떤 아이는 일곱살 반 이라고 대답하고, 어떤 아이는 여섯살과 4분의 3 이라고 대답하고, 또 어떤 아이는 다음 주에 일곱살이 되어요, 다음 달에 여덟살이 되어요, 하는 식으로 무척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비교라는 것은 비숫한 것끼리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리도 다양하고 다른 나이는 비교의 대상이 되기가 어렵다.
3. 그 외에 숫자와는 거리가 먼 환경
1학년 3반, 2학년 5반, 하고 이름을 붙이는 대신에, 1학년 왓킨스 선생님반, 2학년 그린 선생님반 하고 부른다.
1월, 2월, 3월이라는 말이 없고, 각 달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
이런 사실들은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어린이에게는 매일매일 숫자 연습을 하고 안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숫자의 이름이 십진법을 따르지 않는다. 한국말에서는 십 일, 십 이, 십 삼… 이십 일, 이십 이… 백 십삼… 삼백 오십 칠… 하는 식으로 11, 12, 13… 21, 22… 113… 357 이런 아라비아 숫자를 그대로 읽으면 된다. 영어에서는 11을 텐 원 이라고 하지 않고 일레븐 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텐 투, 텐 쓰리, 텐 포, 라고 하지 않고 각기 다른 명사가 있다. 십진법은 체계적이고 그 원리만 깨우치면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영어의 어휘는 그렇지가 못해서 어린 아이들은 재빨리 읽고 계산하는 것이 어렵다.
이러한 전차로…
미국 어린이들은 수학 학습에 지대한 장애를 겪고 있으므로, 이번 연구결과를 토대로 조금이나마 그들의 수학 학습을 돕는 방법이 개발될 수 있기를 바란다 🙂
2015년 5월 22일
참, 그리고 화폐에 관한 재미난 차이도 있는데, 레이아가 문헌연구를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기도 하다.
미국 화폐에서 동전은 그 크기와 모양이 금액의 많고 적음을 제대로 표상하지 못한다. 5센트 짜리 동전이 10센트 짜리 동전보다 더 크고 두껍다. 가장 작은 금액인 1센트와 10센트 동전은 비슷한 크기이다. 다행히도 1센트와 10센트 동전은 색깔이 달라서 구별이 쉽다.
그리고 내가 직접 발견한 문제점은, 모든 동전의 앞면과 뒷면에 그 동전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가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의 동전은 한 면에는 한글로 오백원, 다른 면에는 숫자로 500 이라고 적혀있어서, 동전의 모양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금액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미국 동전에는 그 어떤 것에도 아라비아 숫자는 전혀 적여있지 않다. 그렇다고 영어로 적혀있는 것도 참 부실하다. 1센트 동전에는 1센트라고 적혀있지만, 5센트 동전에는 ‘자유’ 라느니 ‘신 안에서 믿음’ 이런 문구만 적혀있고 금액의 표기는 전혀 없다. 10센트 동전에는 그 동전의 이름인 ‘다임’이라고만 적혀있어서 다임이 10센트임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짜리 동전인지 알 수가 없다. 25센트 동전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