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 언덕 방향으로 두 집을 지나면 제이비와 샬롯 부부의 집이다. 이 부부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동료 교사였고 지금은 은퇴해서 외손주들을 돌봐주려고 딸 사위가 사는 블랙스버그로 이사를 왔다. 큰 손주가 고등학생이어서 걸어서 외갓집으로 하교하기도 하고, 둘째 손주는 둘리양과 동갑인 초딩이라서 부모가 바쁠 때 외갓집에 와서 지내는 일이 자주 있다. 곧 둘째 손주도 중학생이 될테니, 우리 동네 킵스팜 주택단지가 중고등학생 손주들을 돌보기에 최적의 위치이다. 미국의 전형적인 친절한 은퇴자들이 그러하듯, 제이비도 동네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고 오지랖 넓게 조언을 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예의상 조언을 들어주다가, 제이비가 테니스를 배우려고 라켓을 구입하게 되었을 때부터 입장이 바뀌어서 남편이 늘 제이비에게 신문물을 가르쳐주고 있다. 고장이 나서 버리려던 세탁기를 수리해서 거금을 절약하게 해준 일도 있고, 아이폰의 배터리를 남편이 정교한 솜씨로 교환해 주기도 하는 등, 여러 모로 우리에게 신세를 많이 졌는데 그걸 갚으려고 늘 노력을 해서 도와주는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지난 12월의 어느날, 아이들은 학교에 간 시간에 우리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제이비는 코난아범 덕분에 한국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요즘은 세종대왕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그래서 식탁 매트를 한글이 적힌 것으로 준비했다. 거하게 먹는 저녁 식사가 아니고 점심이라서 메뉴를 단촐하게 정했다. 대신에 예쁘게 담아서 눈으로 보면서 먹는 즐거움을 더하려고 노력했다. 각자 접시에 돈까스와 여러 가지 음식을 예쁘게 담아서 서빙하고, 더 먹고 싶은 음식은 더 덜어서 먹을 수 있도록 식탁 가운데에 놓았다. 방학중이어서 여유로운 시간이라 계란말이를 하트 모양으로 썰어서 담기도 하고, 당근을 꽃모양으로 조각하기도 했다. 웨스트 버지니아 시골 마을에서 일생을 보낸 노부부에게 최대한 멋진 한국 밥상을 보여주고싶기도 했다. 또한, 무엇이든 척척 고치고 만들어내는 남편에게 걸맞는 마누라라는 점도 보여주고 싶었다 ㅎㅎㅎ
노부부는 나의 밥상에 감탄을 하며 맛있게 잘 먹었다. 맛은 물론이고 담음새가 너무나 훌륭하다며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샬롯은 당근을 꽃모양으로 만드는 법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 날 뿐 아니라 다음날에도 또 자세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었다. 평소에 요리를 잘 못하고 그래서 잘 안한다고 하면서도 꽃모양 당근은 꼭 만들어보고 싶었던가보다.
2022년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