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로 비지팅 스칼러 오셨던 공주 교대 한명숙 선생님은 얼마전에 교수협의회장 직을 마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셨다.
공주교대 총장 공석 2년 3개월…교육부를 한탄한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6572
교수협의회는 미국에서는 faculty senate 이라고 부르는데, 국회나 도의회 시의회 처럼 각 대학에도 의회가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구로 일한다. 대학 의회는 각 단과대와 학과를 대표하는 의원이 멤버가 되고 그 멤버들이 투표해서 의장을 선출한다. 학과 대표 의원은 매주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고 그 결과를 자기 학과 교수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만약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섭외해서 대신 보내는 일도 해야 하는 제법 부담이 큰 일이다. 의회의 안건은 대부분 새로운 교과목을 개설한다든지 학칙의 개정 등을 의논하지만 가끔씩은 무척 중요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작년 우리 학교에서는 재정 삭감으로 인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테뉴어를 받은 교수라도 총장 권한으로 해고할 수 있다는 규칙을 새로이 정하는 일을 두고 엄청난 설전과 저항이 있었다. 그런 부담스러운 일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이 의장이다.
한명숙 선생님은 의장직을 수행하는 동안에 총장 공석 문제로 고생을 하신 듯 하다. 링크에 걸린 기사를 읽어보면 한국과 미국의 대학 총장 임용 과정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물론 한국에서도 국공립 대학과 사립대학의 임용과정이 다르기도 할 것이다. 암튼 2년의 임기를 마치고 골치아픈 의장직을 떠나 연구실로 돌아온 한명숙 선생님은 남북한 통일 교과교육 학회를 창설하려는 일을 하고 있으며, 비지팅 스칼러로 와서 했던 일들을 책으로 출판하려고 하신다. 학회의 영문 이름을 정하는 것 때문에 내게 자문을 구하셨고, 출판할 책은 나와 함께 의논하고 실행했던 프로젝트가 주요 내용이어서 나와 연락을 주고 받을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기본 개념을 정립해야 하는데 그 때문에 때아니게 인류학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청바지 상표로 유명한 레비스트로스 (Levi-Strauss, 리바이스 청바지의 상표와 같은 이름이다 ㅎㅎㅎ) 는 프랑스 인류학자인데 그가 불어로 쓴 것을 영어로 번역한 책을 읽으며 bricolage 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명숙 선생님은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계신다. 레비스트로스는 전세계를 돌며 설화를 비교연구 했는데, 하나의 설화가 지역과 문화를 달리하는 곳에서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서 문화라는 것은 사람들의 생활상에 따라 변형이 가능한 생동적인 것이라고 본다. bricolage는 불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DIY (Do It Yourself) 가 근접한 뜻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설명하자면 셀프 인테리어 셀프 미용 등에서 쓰이는 셀프- 가 비슷한 뜻일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의 예로 든 설화 몇 가지를 보면 어떤 산악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에서는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 주인공이 나무 열매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거기서 멀리 떨어진 강변 지역에서는 전체적인 틀거리는 비슷하지만 나무 열매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는 내용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인 주인공이 할머니와 손녀딸로 바뀌기도 하고, 쌍둥이 형제가 외동딸로 바뀌는 등의 변형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헤라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전설이 우리 나라에서는 환웅과 웅녀의 결혼으로 단군이 태어났다는 전설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한명숙 선생님과 내가 계획하고 실행했던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언어 교육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고 언어 교육의 도구로 삼았었다. 호랑이를 물리친 팥죽 할멈 이야기를 듣고 한국어로 된 조리법에 따라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직접 요리해보는 식이다. 호랑이, 할머니, 팥죽 등의 새로운 어휘를 배울 수도 있고, 산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았던 역사를 알 수 있고, 새의 알처럼 생긴 새알심의 유래나 지게의 생김새와 용도를 배울 수도 있어서, 단순히 깍두기 공책에 기역니은을 백 번 베껴쓰고 받아쓰기 시험을 치는 것보다 재미있고 유익한 교육이 된다.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을 대입해보자면, 한국에서는 동지에 먹는 팥죽이 미국 교포 가정에서는 절기와 상관없이 특별한 간식으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된 것이다. 또한, 한국어 교육도 본국에서의 방식이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글과 한국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한국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고 노력을 기울여 부가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일이고, 그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어 학습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어서 흥미와 동기부여가 없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어른들의 다소 꼰대스러운 생각으로 ‘한국인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지’ 라거나 ‘세계적으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한글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는 주장으로 억지로 학습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득이다. 재외교포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지원이 이미 한국정부에서 시작되었지만, (재외국민용 교과서가 무료 배포되고 한국어 교사 강습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 지만, 내가 사는 명왕성은 교포 수가 적어서 그런지 이런 지원을 접할 수 없다) 이런 문화와 입장의 차이를 아직은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쓸 책이 이런 접근에 대한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22년 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