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가을부터는 뜨개질을 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손에 땀이 나지 않아서 실과 바늘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편물이 내 무릎을 따뜻하게 덮어주어서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아이들 레슨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낼 목적으로 시작한 뜨개질이 점점 실력이 향상되어 이제는 겁없이 이것저것 만들기를 도전하고 있다.
우리 학과에 곧 일흔 살이 되시는 선배 교수 리즈는 언제나 활기찬 리더쉽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내가 만든 김치를 무척 좋아해서 해마다 김장을 하면 김치를 나눠주곤 했는데 아마도 이번 김장이 마지막 김치 선물이 될 것 같다. 봄학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 교수직은 정년퇴직 연령 제한이 따로 없고, 누구나 언제든지 원하는 시기에 은퇴를 결정하는데, 대부분 30년 근속을 마치면 은퇴를 한다. 30년을 넘어가면 연금 인상의 상한선이 되어서 퇴직 후 받은 연금의 금액이 오르지 않기 때문인 듯 하다. 또한 만 63세 이상이 되면 메디케어 라고 하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직장 보험이 없어도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동료들은 65세를 전후로 은퇴를 하는 편이다.
일흔이 되는 리즈는 나이로 보나 그동안의 업적으로 보나 은퇴를 해도 충분하지만, 내가 처음 임용되었을 때부터 좋은 선배가 되어 주어서 나는 그녀의 은퇴가 아쉽기만 하다.
아쉬움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우리 학교의 상징 색인 빨간 털실로 무릎 담요를 만들었다. 학교의 로고와 우리 학과의 이름과 리즈의 이름을 적어 넣기도 했다.
이번 학기 마지막 교수 회의가 있던 날 선물을 전달했는데 팔짝 뛰며 좋아했다 🙂
크리스마스의 상징과도 같은 지팡이 모양 민트 사탕은 월마트에 가면 12개 들이 한 박스에 2달러가 안되는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코바늘로 캔디 포장을 뜨면 한 개 만드는 데 20분 정도 걸린다. 주말에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틀어놓고 뜨개질을 하면 금새 여러 개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둘리양 피아노 발표회 리셉션에 세 박스를 만들어 가고, 동네 쿠키 교환 행사에도 한 개씩 넣고, 학과에서 하는 송년 행사에도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었다. 저렴한 재료비와 간편한 손품에 비해 받는 사람들은 무척 기뻐하는 가성비 높은 선물이었다.
올해의 동네 쿠키 교환 행사는 작년과 재작년에 비해 규모가 축소되었다. 내 짐작으로는 행사 신청 마감일이 너무 일러서 신청을 한 사람이 줄어든 것 같다. 나부터도 12월 3일까지 참가 여부를 정하라는 메세지를 11월 중순에 받았는데, 그 때는 학기가 너무 바쁠 때라서 참가 신청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한 집당 반 더즌 (6개)씩 쿠키를 주기로 했는데 양이 너무 많다는 의견이 있었는지, 올해부터는 한 집당 4개씩만 준비하라고 했다. 우리집까지 포함해서 열 집이 참가하니 쿠키를 마흔개만 구우면 되었다. 이전에는 백 개씩 구워야 했는데 이번에는 일이 너무 단촐해져서 쿠키 포장 안에 뜨개질로 포장한 캔디를 하나씩 더 넣었다.
이웃들 중에도 나처럼 느낀 사람들이 있었는지 4개만 주면 되는 쿠키를 여전히 여섯 개씩 넣은 집도 있었고, 쿠키와 더불어 다른 과자를 더 넣은 집도 있었다.
쿠키 레서피를 동봉해서 나누는 규칙 덕분에, 먹어보고 맛있는 쿠키를 레서피를 보며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어서 좋다.
겨울 방학 동안에 몇 가지 쿠키를 만들어볼 계획이다.
어느날 둘리양 준비물을 사러 갔다가 반값으로 할인하는 털실을 보았다. 원래 가격은 12달러인데 반값에 가까운 7달러로 판다는 털실은 알록달록한 색이 섞여있고 보드라운 촉감 때문에 아이 옷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아기 옷은 크기가 작아서 금새 마칠 수 있기 때문에 뜨개질 하는 재미도 더 크다.
우리 학교 마케팅 학과의 신참 한국인 교수의 딸에게 카디건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이번 뜨개질에서 마침내 돗바늘로 고무뜨기를 마무리 하는 법을 배웠다. 그냥 코를 막아서 마감하는 것보다 돗바늘 마무리가 보기에도 좋고 신축성이 높아서 입기에도 좋다. 귀여운 모양의 단추와 장식을 달아주니 내 눈에도 흡족해 보였다.
선물을 받은 날 저녁에 아기에게 입혀서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도 이 사진을 보내드렸고 부모님께서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셨다고 한다. 주말에 티비 보면서 손을 놀린 결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게 되어서 보람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나니 학교 선생님과 직접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눌 일이 거의 없다. 과목별로 다른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 형식적으로 담임 교사가 지정되어 있지만 학생 지도를 초등학교처럼 세심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크리스마스나 선생님 감사 주간에 (미국은 스승의 날 대신에 학년이 끝나가는 5월 중순에 한 주일을 선생님 감사 주간으로 지정하는 학교가 많다) 선생님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해졌다.
학교 선생님 대신에 레슨 선생님들께 선물을 준비했다. 둘리양의 피아노 선생님은 교회의 뮤직 디렉터이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그 무언가를 선물해도 좋을 것 같았다. 다양한 명절을 지키는 이민자의 나라에서는 선물을 받을 사람의 종교나 문화적 배경을 알고 그에 맞는 선물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슬람 국가에서 이민온 미국인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크리스마스 카드나 선물을 하는 것은 최소한 쓸데없는 선물이거나 무례한 짓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 있다.
피아노 선생님은 안심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는 선물을 해도 좋을 사람이니 뜨개질로 카드를 만들고 머리핀도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수제로 직접 만든 물건을 무척 귀하게 여기는 성향이어서 주머니는 가볍고 손재주는 괜찮는 나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코난군의 바이올린 선생님과 아트 선생님에게는 잔받침을 떠서 선물했다. 이것만 드리기에는 약소하니 작은 상품권을 함께 드리거나, 한국인인 아트 선생님께는 내가 만든 김장 김치를 함께 드렸다. 김치 선물이라니… ㅎㅎㅎ 하지만 내가 사는 이 산골 마을에서는 맛있는 김치가 귀한 선물이 될 수 있다.
둘리양은 드라마 클럽과 밴드 연습 등으로 바빠서 이번 학기 아트 레슨을 빠졌고, 코난군은 여전히 아트 레슨을 받고 있다. 함께 레슨을 받는 아이들은 코난군의 절친인 조나스와 한국인 여학생 줄리아가 있다. 줄리아는 로아녹 청소년 오케스트라에도 다니고 있어서 카풀을 함께 하고 그래서 부모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줄리아의 엄마는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중인데 겨울 방학이 되면 한가한 시간이 생기니까 아트 선생님과 함께 예쁜 공예품을 만들어 보자고 의논을 했다. 아트 선생님이 재미삼아 왁스 방향제를 만드는데 우리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왁스 방향제는 벌집에서 채취한 왁스와 콩기름으로 만든 왁스를 일정 비율로 섞어서 녹이고, 거기에 아로마 향 오일을 넣어서 굳히는 것인데, 왁스가 굳기 전에 말린 꽃잎과 구슬 같은 것을 얹어서 꾸미는 것이다.
모든 재료 구입과 준비는 아트 선생님이 다 해주시고 우리는 재료비를 분담하기만 하면 되었다. 장소도 제공하고 뒷정리까지 해야 할 아트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만들기를 하는 날 함께 먹을 김밥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줄리아 엄마도 염치가 있고 음식 솜씨도 좋은 사람이어서, 김밥과 함께 먹을 만한 음식 한 가지를 만들어 오겠다고 했다.
방향제 만들기를 위해 모인 날, 아트 선생님은 우리가 가지고갈 음식에 곁들여 먹을 국을 끓여놓으셨다. 그 날은 눈이 내리고 무척 추운 날씨였는데 따끈한 된장국물이 참 맛있었다. 작업을 시작하면 중단할 수 없으니, 만들기를 하기 전에 식사부터 하기로 했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고 오랜만에 느긋하게 수다를 하는 것도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방향제를 만들고 나서도 재료가 아직 많이 남아서 겨울 방학 중에 한 번 더 시간을 내서 모이기로 했다. 그 날도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방향제도 더 많이 만들자고 약속했다.
2023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