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처 Bleacher 가 마련되어 있는 밋 Meet

블리처 Bleacher 가 마련되어 있는 밋 M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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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에서 살아온지도 벌써 25년이 넘었고, 내 영어 실력은 이제 미국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밥벌이를 하는데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아직도 새롭게 배우는 말이 있다.
며칠 전 둘리양의 육상팀 코치가 육상대회에 관한 안내 이메일을 보냈는데, 대략 몇 시에 출발하고 어디에서 하고, 그 장소의 편의시설 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별 어려움없이 술술 읽어내려 가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물음표가 떴다. 육상 대회를 하는 곳이 ‘미식축구 경기장이어서 블리처가 있다’ 라고 하는데 블리처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 그게 있어서 아이들 경기에 무슨 잇점이 있는지, 지장이 있는지,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이메일에서 그게 있으니 뭘 어떻게 하라는 말도 없었다.

이게 바로 블리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요즘은 영어 사전을 대신해서 인터넷 검색으로 단어의 뜻을 찾아본다) 운동 경기를 관람하도록 마련된 저렴한 관중석이라고 한다. 사진을 찾아보니 둘리양의 마칭밴드를 구경할 때 늘 앉던 바로 그 벤치였다. 그것의 이름이 블리처 였던 것이다.
Bleach는 표백하다 라는 뜻인데 거기에 -er이라는 어미를 붙였으면 표백하는 것, 표백제 라는 뜻이 아닌가? 경기 관람석이 표백제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bleach에 내가 모르던 숨은 의미가 있었나? 궁금해 하며 더 검색을 했더니 정말 기가 찬 답이 나왔다.

햇빛에 바랜 관중석

요즘은 철제로 만들지만 옛날에는 나무로 만들었던 이 관중석 벤치가 햇빛에 색이 바래기 때문에 “색이 바래는 것” 이라는 뜻으로 블리처 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물건의 용도나 직관적 생김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을 이름으로 정하다니! 이건 토익 만점자도 모를 수 있고, 영어를 쓰는 영국인이나 호주인도 알기 어려운 말이다. ㅎㅎㅎ

육상 코치의 이메일인즉슨, 경기 관람을 하러 오는 학부모들이 굳이 의자나 깔고 앉을만한 물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는 정보를 전해준 거였다. 블벅중고 육상 경기장에는 없는 시설이라 어웨이 경기를 관람하러 오는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짐을 줄이도록 배려해서 안내해준 것이다.
그러고보면 육상 경기 대회를 뜻하는 단어 밋 Meet 이라는 말도 어처구니가 없다. 게임 Game, 매치 Match, 토너먼트 Tournament 같은 말 대신, 육상과 수영 종목의 대회는 밋 Meet 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경기를 위해서 여러 명의 선수들이 ‘만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선수들이 안만나고 하는 경기도 있나?

한국어에도 비슷한, 이름만 들어서는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고시원. 요즘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고시텔 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사법고시와 같이 장기간 준비해야 하는 시험 공부를 위해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 아무도 없이 홀로 조용한 공간에서 공부를 하도록 마련한 공간이 고시원 “이었는데” 사법고시 조차 폐지된 요즘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 저렴하게 장기 투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시 공부는 커녕 책 한 권 읽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되었다. 변화해온 사회 안에서 살던 사람은 별 불편함이나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명칭이다. 미국인 친구에게 통역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외국인이 고시원 이라는 말의 어원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블리처 라는 말에 대해 느낀 것과 비슷한 어처구니 없음을 느낄 것 같다.

2025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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