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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에 별관심이 없던 십 수년 전부터 대학 입학 심사에서 에세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을 들었다. 특히 학구적으로 내신 성적 최상위, 에스에이티 같은 표준화 시험 점수 만점, 누구나 하는 악기 연주, 스포츠, 사회 봉사 활동 등의 완벽한 경력을 쌓은 동양인 아이들이 차별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방법은 오직 잘 쓴 에세이 뿐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게다가 부모가 영어를 늦게 배운 이민 가정의 아이는 아무래도 영어로 글쓰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 똑같은 조건의 미국 본토박이 아이들 보다는 뒤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에세이 라는 것에 대한 중압감을 더했다.
매사에 천하태평 성격인 나조차도 그 “에세이” 라는 것에 대해 중압감을 느낄 정도이니, 보통의 다른 한국계 부모들은 나보다 더한 정도의 우려와 초조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심리를 이용한 돈벌이 시장은 언제나 활황이다. 소위 입시 컨설팅 이라고 하는 업종이 그것이다. 미국 대학 입시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 부모들에게 접근해서, 당신 자녀의 대입을 돕겠다며 에세이 교정을 해주고, 교외활동 경력을 근사하게 포장하거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고 들었다.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대도시 근교에서 이런 사업이 번창하고 있는데, 요즘은 온라인이라는 신문물 덕분에 명왕성과도 같은 우리 시골 마을에서도 에세이 컨설팅을 받았다는 한국인 아이들이 제법 있다. 코난군의 한국인 친구의 엄마가 (비교적 미국에 온지 오래되지 않아 내게 미국의 실정에 대해 자주 문의하는 편이다) 에세이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그런 컨설팅을 받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코난군이 12학년이 되고 커몬 앱 어카운트를 만들자마자, 아이디와 비번을 달라고 해서 에세이에 관해 살펴보았다. 커몬 앱 페이지에 올려두는 커몬 에세이는 필수이고, 마이 컬리지 메뉴에 내가 골라둔 학교 메뉴를 각기 살펴보면 어떤 대학은 따로 더 에세이를 받지 않고 커몬 앱에 올라와있는 커몬 에세이만을 심사한다고 하고, 또 어떤 대학은 추가로 에세이를 한 편 더 쓰라고 하는 곳도 있었다. 에세이 주제를 정해주기도 하고,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서너 개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짧은 글을 서너 개 써야 하는 곳도 있었다.
예를 들면 버지니아 공대는 커몬 에세이 대신에 다음의 질문에 각기 120 단어 분량으로 글을 쓰도록 한다.
1. 버지니아 공대의 교훈인 “Ut Prosim(그리하여 내가 섬기리라)”을 바탕으로, 당신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공동체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공유해주세요. 얼마나 오랫동안 참여했으며,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버지니아 공대에서 그 경험을 어떻게 나누고 싶은가요?
2. 버지니아 공대의 “Community 의 원칙(Principles of Community)”은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며, 이해와 표현을 촉진하고,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합니다. 당신 혹은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소외된 경험이 있나요? 이에 대해 도움이나 자원을 요청했나요? 당신이 변화를 일으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나요? 그 경험이 당신의 시각을 바꿨나요?
3. 당신이 본인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역할 모델이었거나 리더십을 발휘했던—을 한 번 공유해주세요. 그 경험에서 당신이 기여했던 구체적인 기술은 무엇이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의존을 했었나요?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당신은 자신에 대해 무엇을 배웠나요?
4. 당신이 설정한 목표 하나를 설명해주세요. 그 목표를 설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단계를 밟을 예정인가요? 언제까지 이루려 하나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 격려해주거나 조언해주는 사람이 있나요? 그들은 어떻게 당신을 지지하나요?
9월 26일까지 버지니아 공대 온싸이트 전형 지원을 마감해야 해서 코난군은 부랴부랴 위의 에세이 쓰기를 하루 이틀 사이에 마쳤다. 블벅고에서 해마다 백 명도 더 합격하는 대학교여서, 코난군과 우리 가족은 안전 지원하는 편안한 마음이라 이 에세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버지니아 대학교 지원을 위한 커몬 앱 에세이를 지난 주말에 쓰게 되었다. 버지니아 대학교는 작년 까지는 커몬 에세이에 더해서 추가 에세이를 더 제출하라고 했지만 올해에는 간호학 전공 이외에는 커몬 에세이만 받는다고 했다. 해마다 대동소이한 커몬 에세이의 주제는 다음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고 분량은 650단어이다.
1. 배경, 정체성, 관심사 또는 재능 중에서 그것이 너무나 중요하여 “내 지원서가 그것 없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 우리가 마주한 장애물에서 얻은 교훈은 나중의 성공에 매우 근본적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직면했던 도전, 좌절 또는 실패의 순간을 회상해 보세요.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3. 당신이 어떤 신념이나 아이디어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했던 때를 돌아보세요. 무엇이 당신의 생각을 바꾸게 했고, 그 결과는 어땠나요?
4.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한 일이 있었고, 그것이 뜻밖의 방식으로 당신을 기쁘게 하거나 감사하게 만든 적이 있다면 그 순간을 돌아보세요. 그 감사의 마음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당신의 삶에 어떤 동기를 주었나요?
5. 당신이 성취한 일, 경험한 사건, 또는 깨달음 중 하나가 당신의 개인적 성장을 촉발했고, 당신이나 타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열었다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6. 당신이 너무 몰입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주제, 아이디어 또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을 설명해주세요. 왜 그것이 당신을 사로잡았고, 더 배우기 위해 누구 또는 무엇을 찾게 되나요?
7. 당신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나눠도 됩니다. 이미 썼던 글이거나 다른 문항에 대한 답변이거나, 혹은 당신 스스로 새롭게 디자인한 주제도 가능합니다.
마지막 주제에서 보듯, 사실상 그 무엇이라도 주제로 삼아 쓸 수 있는데, 목적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합격시켜 주세요 라고 읍소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내가 말이야,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구! 하는 접근 방식도 바람직하지 않다.
자랑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고 담담하게 나에 대해 650단어로 (1과 1/4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 쓰는 건데, 나의 첫 의문은, 고작 한 페이지가 조금 넘는 글을 도대체 얼마나 잘 교정해 주길래, 아니 통째 대필을 해준다 하더라도 몇 백 내지 몇 천 달러씩 지불하면서 컨설팅 서비스를 이용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학생을 면담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대신 써주는 것이 서비스 내용인 것 같다. 매끄러운 문장과 거짓말이 아닌 한도 내에서 부풀린 경력은 돈을 내고 살 수 있겠지만, 실제로 경험하고 느낀 생생한 글은 학생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다. 내가 인식하기로는 대학 입학 에세이는 백일장 대회가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대필을 해준다해도 우리 아이의 정체성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코난군이 에세이 초안을 다 썼을 때 내가 읽어주고,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수정하면 좋을 부분,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부분을 말해주었다. 문법이나 문장 구성은 나보다 영어 원어민인 코난군이 더 잘 하겠지만 주제로 삼은 글 내용 중에 내가 더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소설책을 쓴 경험이 있는 코난군은 글솜씨가 보통 수준 보다는 높은 편이어서 초안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에세이로 보였다 – 눈에 콩깍지가 끼었을지도 모르는 엄마에게는 그랬다 ㅎㅎㅎ
몇 번의 수정을 마치고 최종본 에세이가 완성되었다. 영리한 코난군은 원래의 초안을 수정해서 덮어버리지 않고, 각각의 수정본을 다른 버전으로 저장해두어서 최종본을 그 중에 가장 잘 된 것으로 골랐다. 내가 제안하지 않았지만, 코난군이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엄마 눈에 콩깍지가 한 번 더 씌워졌다 ㅎㅎㅎ
챗지피티에게 최종본을 보여주고 오타나 문법 오류가 있는지 봐달라고 했더니, 전혀 없다고 했다. 대신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감정의 건너뜀이 없도록 하기 위해 문장을 고쳐 쓰거나 추가하면 좋겠다며 예시문을 보여주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인공지능이 방대한 영어 글쓰기 데이터를 바탕으로 누가 봐도 완벽하고 흠없는 매끈한 에세이로 고쳐주겠지만, 그건 코난군의 생각과 방식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10월 24일인 오늘 아마도 버지니아 공대 합격증을 받아올 것이다 (블벅고 합격자가 너무 많아서 우편으로 발송하지 않고 학교에서 합격증을 나눠준다고 함).
12월 15일이 되면 코난군의 에세이가 정말로 잘 쓴 것이었는지, 엄마 눈에만 그리 보였던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코난군의 실제 커몬 에세이는 따로 소개하려 한다.
======저녁에 추가함======
버지니아 공대 공학부에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아왔다.
최근에 버지니아 공대는 해마다 전국 대학 순위를 꾸준히 올려서 요즘은 전국적으로도 제법 인지도가 높아졌다. 버지니아 주 안에서는 규모로는 가장 큰 학교, 입학하기 어렵기로는 버지니아 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인 주립 대학이다. 그런 학교의 입학을 선점해두었으니 든든하다.
2025년 10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