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인 어제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를 나섰다.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도시 렉싱턴에 코난군을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다. 3주일이나 지내다 오기 때문에 그동안 코난군이 갈아 입을 옷과 생활용품 등등 챙겨야할 짐이 무척 많았다.

렉싱턴은 아주 오래된 작은 마을인데, 여기에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와 명문 사립대학인 워싱턴 앤 리 대학교가 있다. 코난군이 지원해서 선발된 버지니아 주지사 외국어 학교가 워싱턴 앤 리 대학교에서 열린다. 외국어 학교에는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룹이 있고, 일본어와 라틴어 그룹은 또다른 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다. 외국어 말고도 과학기술, 예술, 인문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주지사 여름 학교가 열리는데, 버지니아 주 고등학생들이 지원하고 선발되어 숙식은 물론이고 수준높은 강사진으로부터 수업을 받는 학비가 모두 무료이다.

여름 방학이 긴 미국에서는 여름 캠프가 많이 열리는데, 그 중에서도 명문대학교들이 실시하는 여름 캠프는 대학 입시에 유리한 스펙을 쌓으려는 고등학생들이 서로 입학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고, 그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예전에 우리집 옆집에 살던 아이는 이런 비싼 캠프를 해마다 다니곤 했다. 부모가 우리 부부보다 몇 배로 돈을 잘 벌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코난군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이런 경험을 공짜로 하게 되었으니, 코난군이 참 대견하다. 3주일간 숙박비와 식비만 계산해도 몇 천 달러는 될 것이고, 수준 높은 수업의 강사료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보살펴주는 캠프 직원들의 임금을 생각하면, 그리고 다른 유명 대학 여름 캠프 등록비를 참고하면, 못해도 만 달러 정도의 가치는 될 듯 하다.

내 후배의 딸아이가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는 워싱턴 앤 리 대학교는 히든 아이비 라고 불릴 만큼 역사가 오래되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소규모 사립 대학교 (Liberal Arts College) 이다. 디비젼 3 (이건 설명하기 복잡한데, 미국 대학 운동팀 리그를 분류하는 기준이다) 테니스팀이 있기도 해서 코난군이 입학해서 다니면 좋을 학교이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고 테니스 팀 수준도 아주 높아서 코난군의 실력으로는 선발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계기로 코난군이 이 학교에 지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장학금을 받으려고 노력을 할 수도 있겠지.

렉싱턴에 도착해서 아주 맛있는 햄버거 점심을 먹고 등록을 하기 위해 워싱턴 앤 리 대학교로 갔다. 여섯 동의 기숙사 건물에서 외국어 학교 아이들이 3주일간 지내게 된다. 코난군은 4번 하우스로 배정을 받았는데, 짐을 나르면서 살펴보니 여섯 개 건물이 모두 비슷한 크기와 구조로 보였다.

해리포터 영화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어떤 하우스로 가게 될지 마법의 모자를 씌워서 배정하는 장면이 있다. 버지니아 주지사 외국어 학교는 하우스 배정을 언어와 성별로 지정해 주었다. 각 하우스 1층에는 커다란 다이닝 룸과 리빙 룸이 있고 2층에는 침실이 있었는데 2인실이 대부분이고 소수의 1인실이 있었다.

코난군은 1인실을 선호한다고 써냈는데 운좋게도 1인실에 당첨되었다. 친한 친구라면 함께 침실을 사용해도 좋겠지만, 난생 처음 본 아이와 침실을 공유하는 것은 리스크가 제법 크다. 잘 안씻어서 냄새가 난다든지, 코를 곤다든지, 더 나쁘게는 인성이 좋지 못한 아이여서 싸움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렉싱턴으로 가는 길에 차안에서 코난군은 룸메이트가 어떤 아이가 될지 걱정했는데, 등록을 위해 기숙사로 가서 1인실을 배정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음을 놓았다. 나역시 마찬가지로 걱정 하나를 덜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3주일 동안은 전화도 컴퓨터도 소지를 불허하는 규칙이 있어서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낯선 아이와 침실을 공유하느라 불편한 점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 독방을 쓰더라도 낮 시간 동안에는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수업을 받고 활동을 하고, 또 기숙사 1층의 거실과 식당에서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많으니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또 하나의 학교 규칙은 독일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숙사 방을 배정받을 때부터 직원들은 부모인 우리에게는 영어로 대답하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코난군에게는 독일어로만 말을 했다. 예를 들면, “이 목걸이 지갑 안에는 네 방 열쇠가 들어있고, 네 방 번호는 305번이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는 복도 오른쪽에 있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서 요청해”, 하는 말을 독일어로만 하는데, 코난군은 어림짐작으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3주일간 기숙사에서의 생활과 교실에서의 모든 수업은 독일어로만 진행되고, 아이들끼리도 독일어만 사용해야 하고, 그래서 컴퓨터나 전화기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영어로 된 책도 반입을 금지했다. 기숙사 곳곳에는 “계단 주의”, “화장실”, “세탁실”, 등의 표지판도 모두 독일어로 붙여 두기도 했다.

기숙사 방에 짐을 풀고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갔다. 독일어 학교 입학식은 오후 4시였는데, 그보다 앞서 스페인어 학교 입학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우리 가족은 강당 밖에서 기다렸다. 날씨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캠퍼스 산책을 했겠지만, 이 날 기온이 너무 높아서 걸어 다니기에 좋지 않았다. 차로 한 바퀴 돌아볼까 했지만 방학을 맞은 학교 곳곳이 공사중이어서 그역시 마땅치 않았다.

버지니아 외국어 학교는 올해로 40주년을 맞았으며, 버지니아 주 전역에서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선발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서 좋은 경험을 하고 간다는 설명이 있었다. 실제로 강사나 직원으로 선발된 사람들 중에도 과거 버지니아 독일어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이 많았고, 학교를 마친 대부분의 아이들이 더없이 좋았던 경험이라 말한다고 했다.
코난군이 독일어를 선택했던 것은 아빠의 영향이 컸다. 코난아범이 한국에서 고등학교때 독일어를 배웠고, 또 나중에는 독일 유학에 관심이 생겨 독일어를 따로 조금 더 공부한 적도 있고, 독일인 친구를 사귀어서 유럽 여행 중에 독일에서 머문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블벅고에서 들을 수 있는 다른 외국어 수업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 에 비해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빠가 도와줄 수 있는 독일어가 유리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 프랑스어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문법과 철자법과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대입 학력고사에서 외국어 대신에 가사 과목을 선택해서 시험을 쳤다. 내가 가려고 했던 이화여대가 외국어 시험을 요구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ㅎㅎㅎ 일본어를 선택 했더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겠지만 블벅고에는 일본어 과목이 없었다.

입학식의 마지막 무렵에 사회자가 모든 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핸드폰을 압수해서 식장 밖으로 나가라는 주문을 했다. 핸드폰을 뺏긴 아이들은 곳곳에서 탄식을 하고, 아이들과 헤어지는 부모들 중에는 훌쩍이며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재미있게 잘 지내라 말하고 악수를 나누고 코난군을 두고 나왔다. 다시 먼길을 돌아 집에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더니 화장실에서 눈물을 닦는 엄마들이 몇 명 보였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어서 이렇게 장기간 떨어져본 적이 없어서 그럴게다. 나역시 코난군이 사흘 정도는 캠핑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일주일 이상 집을 떠나보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전화나 문자로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아마 이후에도 그런 상황은 거의 없을 듯

내년에 코난군이 대학에 가게 되면 우리 동네 버지니아 공대로 진학하지 않는 한은 이렇게 짐을 싣고 와서 아이를 떨어뜨려놓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텐데 그 때에 대비한 좋은 연습이 된 것 같다.
둘리양은 코난군의 영향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도무지 자기 속내를 말하지 않는 아이) 내년에 독일어 수업을 신청했다. 어쩌면 몇 년 후에 둘리양도 주지사 외국어 학교에 입학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오빠가 하는 경험을 보고 스스로 결정하겠지.
2025년 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