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국내 최대", "아시아 최고", "가리봉동 최고 인기 가수"… 최고, 최초, 최장, 최단, 최대 등등의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훌륭하다'
'대단하다'
'자랑스럽다' 혹은 '부럽다'
등의 생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에는.
미국에 와서 살면서 느끼는 문화차이 중에 하나가, 여기 사람들은 최초나 최고가 누구인지 그닥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인류 최초로 (의심스런 대목이 많지만서도) 달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 자기네 나라 과학기술과 자기네 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는 하지만, 매사 모든 일에 순위를 매겨서 일등이 누구인지, 이등 삼등의 "순위권"을 확인하고, 맨 꼴찌가 누구인지 확인사살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만큼 일상생활화 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또 흥미로운 차이는, 우열을 가려서 순위를 매기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똑같은 샐러드 요리라도, 우리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의 드레싱은 발사믹 식초 대신에 레몬을 짜서 넣어서 새콤하면서도 상큼한 느낌이 들고, 너네집 드레싱은 올리브 오일이 충분히 들어가서 그윽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뭐 그런 식이다.
그러자니 이 나라 사람들은 자연스레 "입만 살아가지고" 논평을 아주 잘 한다.
그러나 배울만한 점은, 그 논평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그 작품/물건/사람 그 자체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지, 누가 누구만 못하다, 더 낫다, 하는 평가는 철저히 배제한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내 취향에는 이것이 더 어울린다, 정도의 평가일 뿐이다.
문화라는 것이 어느날 이렇게 하자! 하고 정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어느쪽이 더 나은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오잉?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미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다만, <줄을 세우는 것> 보다는 <차이를 발견해내는 방식> 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남보다 못한 내 자신에게 열등감 폭발할 일 없고,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핏대 세워 논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코난군 아범과 연애를 하던 시절에, 아이작 스턴의 바이올린 연주를 함께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씨디로). 그 때만 해도 내가 미국물을 몇 달 먹지 않은 상태라 그랬는지, 대뜸 아이작 스턴이 정경화만 못하다 하고 단정적으로 말을 했다.
나름 예민한 귀로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코난군 아범이 그런 나를 비웃음 30%, 기막힘 30%, 그리고 호기심이 40% 섞인 눈초리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슈아 벨 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연 의 연주는 어떤지 물어보며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바이올린 음악을 계속해서 더 들려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문득 바이올린 음악이 고파서 네 사람의 연주 씨디를 꺼내서 같은 음악이 다른 연주자에 의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중에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지를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뚜렷이 느껴지는 차이를 구별해내는 재미를 누리려면, 일단 음악을 감상하기위한 마음의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와인 소믈리에가 양치질을 깨끗이 하는 것처럼), 한 곡 한 곡에 귀와 정신을 기울여 들어야겠다 (소믈리에가 한 가지 와인을 맛본 후에 입을 가시고 또 다른 종류를 맛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에 감사를 전제로 하고, 그 다른 각각의 아름다움을 최선을 다해 묘사하는 것이다 (신의 물방울 이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와인의 맛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장면이 생각나서 슬그머니 웃었다).
마스네 – 타이스 명상곡을 <조슈아 벨 의 포엠> 과 <지연 의 보칼리즈> 음반으로 들어보았다.
조슈아는 로얄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한 반면, 지연은 단촐한 피아노 반주만 곁들여 연주했다.
소박한 반주 덕분인지, 아니면 여성의 섬세함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연주 기법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연의 연주가 참으로 곱다. 하지만 조슈아의 연주도 아이작 스턴에 비하면 매우 여성스럽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사람은 생긴대로 논다더니… 꽃미남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은 음악도 꽃음악이다… 푸하하
조슈아와 지연이 우아하고 애잔하고 부드러운 그룹이라면, 아이작과 정경화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명장의 느낌이다.
크라이슬러 – 집시 여인 을 <아이작 스턴 의 카프리스 비에누아> 와 <정경화 의 콘 아모레> 로 들었다. 여기서도 아이작은 프란츠 리스트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했고, 정경화는 필립 몰의 피아노 반주만 함께 한다.
십 년 전에는 아이작이 정경화 보다 섬세함이 부족하고, 기운도 딸린다고 느꼈던 것이, 지금은 아마도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를 더 신경썼던 탓이었나보다 하고 고쳐 생각하게 된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깊고 조화로운 맛의 삼계탕이 아이작 이라면, 잘 익은 김장김치에 식초와 설탕을 넣고 탱탱하게 삶은 국수에 비벼서 고소한 참기름 까지 한 방울 얹은 비빔국수가 정경화 연주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이번 여름 방학 동안에 음악을 좀 더 자주 듣고, 음악 이야기를 자주 써보자고 결심한다.
2011년 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