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링 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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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들은 해마다 학교에서 스펠링 비 라는 이름의 시험 혹은 경진대회에 참가한다.

Scripps National Spelling Bee 라는 단체에서 전국적으로 주관하는 이 대회는 9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해마다 올해의 단어 목록을 학년별 수준에 따라 발표를 하면 학생들은 그 단어의 철자를 외워서 시험을 치르는데, 학급에서 가장 잘한 네 명이 선발되어 전교 대회에 나가고, 전교 대회에서 가장우수한 실력을 발휘한 아이는 교육구 대회, 주 대회… 그런 식으로 전국 대회까지 나가게 되는 것 같다.

 

1학년에서 중학생인 8학년 까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대회에 코난군은 벌써 5년째 참가하고 있지만, 부모인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코난군이 저학년이었을 때는 반친구들과의 경쟁은 쉽게 이겼으나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에서는 우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대회가 있었다더라, 5학년 아무개가 우승했다더라, 하는 소식을 학교 소식지에서 읽고 지나가버리곤 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코난군이 자신이 전교 최고 우승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바람에 옆에서 연습을 도와주다보니 스펠링 비 라는 대회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5학년인 코난군은 4, 5, 6학년 수준의 단어를 모두 공부했는데, 반 대표로 선발된 이후에는 7학년과 8학년 수준의 단어도 공부해서 전교 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evicerated, prevaricate, balustrades, affidavit, ambuscade, dervishes, 등등… 

뜻도 모르겠고 어찌 읽어야 하는지도 모를 어려운 단어들을 포함해서 수 백 개나 되는 단어의 철자를 외웠다.

 

저마다 우승을 하겠다며 열심히 외우고 공부한 아이들이 참가한 전교 대회에서 최고의 실력자를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게다.

한 반에서 네 명씩 모두 열두 명의 5학년 아이들이 전교 대회에서 시합을 붙었는데 겨우 다섯 명을 떨어뜨리고 아직도 일곱 명이나 남아 있어서 다음날 다시 대회를 치른다고 했다.

전교 대회에서 탈락한 아이들도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억울하게 떨어졌다.

원래 대회 규정상, 단어의 스펠링을 말하다가 순서가 꼬이거나 말이 헛나오는 경우에는 "다시 시작 (Start Over)" 이라고 말한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철자를 말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전교 대회에서는 사전에 변경된 규칙을 알려 주지도 않고, "다시 시작" 을 못하게 하며 탈락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말을 더듬다가 같은 철자를 반복해서 말한 것을 오답으로 간주하고 탈락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nice 의 철자를 엔, 아이, 씨, 이 라고 또박또박 말해야 하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엔, 아이, 어, 씨, 이 라고 말한 것을 niece 라고 말한 것이라며 탈락 시킨 것이다.

그렇게 탈락한 아이들은 너무 속상해서 울었다고 하는데,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정말로 모르거나 명백한 실수를 했다면 수긍할 수 있지만, 변경된 규칙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말을 더듬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실수 때문에 탈락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코드 그레이의 주제가 떠오른다.

왜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는걸까?

물론, 아이들 대부분이 박사, 교수를 부모로 둔 덕분에 많이 똑똑하고 대회준비도 열심히 했으니 그중에 한 명을 선발하는 일이 무척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규칙을 더 까다롭게 바꾸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변경된 규칙을 사전에 모두에게 공지하고, 또 왜 그렇게 규칙을 까다롭게 바꾸어야만 했는지도 설명을 해주는 것이 지당한 처사가 아닐까?

왜,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 아이들을 속상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는 것일까?

 

코난군은 다행히도 아직 최종 일곱명에 들어 있지만, 내일 다시 열릴 대회에서 실수를 해서 탈락할지도 모른다.

코난아범과 나는 자주 코난군에게, 스펠링 비에서 우승을 하는 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운의 문제이므로 떨어져도 우승해도 그리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스펠링 비에서 우승을 하는 것은 학교 성적에 들어가지도 않고 별 다를 것도 없는 일이다.

 

코난군은 학군 내에서 우승을 하면 킨들 (전자책을 볼 수 있는 기기) 을 부상으로 받기 때문에 꼭 우승을 하고 싶다고 했다.

킨들보다 더 기능이 뛰어난 아이패드를 이미 가지고 있는데 킨들이 무슨 대수냐고 했더니, 그래도 자기한테는 없는 킨들을 상으로 받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꼭 우승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어린애이다… ㅎㅎㅎ

 

전교 대회 첫 날에는 강당에 모인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코난군이 무대에 섰는데, 그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이고 자기만 움직이는데,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청중석에 앉은 친구 한 명이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그 친구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흐트러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깟 스펠링 비 대회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긴장을 했는지…

그렇게 긴장했어도 말을 더듬거나 실수를 하지 않아서 아직도 최종 후보에 들어가 있는 코난군이 장하다.

 

곁들여 둘리양의 스펠링 비 이야기…

 

요 녀석도 승부욕이라면 오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서, 자기 반에서 우승을 하겠노라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1학년 수준의 단어는 코난군의 단어보다 훨씬 쉬워서 내가 연습을 도와주는 것도 쉬웠다.

일주일 정도 연습하고 마침내 학급 대회가 열리던 날은 등교하는 차 안에서 남매가 서로의 단어를 물어봐주면서까지 맹연습을 했다.

그런데 그 날 오후에 둘리양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둘리양이 스펠링을 외우는 중간에 책상 속에 넣어둔 단어 리스트를 살짝 엿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탈락을 시켰는데, 나중에 다른 아이들도 규칙을 본의 아니게 어긴 경우가 생겨서 패자부활전 처럼 둘리양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을 다시 시합에 들어가게 했는데, 둘리양이 최고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의 고민은, 둘리양의 실력이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난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예선전에서 규칙 위반을 둘러싼 잡음이 있었던 아이를 전교 대회에 내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딜레마였다.

그래서 결론은 엄마인 내가 둘리양을 데리고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칼자루를 내 손에 쥐어준 것이다.

어떡하면 좋을까… 곰곰히 한참을 생각했다.

지난 일주일간 정말로 열심히 준비한 둘리양…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충분히 잘 아는 단어 철자를 훔쳐보기까지 했을까…

그런 아이를 반 대표로 전교대회에 못나가게 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더욱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에 선생님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해서 – 둘리양이 규칙을 잘 몰라서 그랬다든지 하는 변명 정도면 선생님도 눈감아줄 기세였다 – 어차피 전교 우승을 하지도 못할 대회에 내보내면 잠시 기분이 좋기는 하겠지만, 장차 아이가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고학년이 되어서, 중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 되어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거나 부정한 방법을 쓴다면 그 때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1학년에 무척 속상하고 내가 왜그랬을까 심하게 후회를 해봐야, 다음번에 유혹이 있을 때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교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저녁 둘리양에게 이런 내 생각을 말했더니 둘리양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없이많이 울었다.

이 녀석의 평소 울음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시위하는 형식인데, 이렇게 소리없이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마도 후회와 통한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둘리양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문장에 신경을 써서 담임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둘리양은 올해 전교 대회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내년에 2학년이 되어서 대회 규칙을 더욱 잘 기억하고 따를 수 있게 되면 그 때 다시 한 번 도전하겠습니다.

이번 일에 엄마와 함께 상의할 기회를 주셨던 것은 무척 감사합니다.

 

라고 쓴 다음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둘리양에게 먼저 읽어보게 했다.

이렇게 보내면 괜찮겠지? 하고 물으니 둘리양이 자진해서 문자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더욱 흐뭇하게도, 몇 분 뒤에 – 꽤나 늦은 밤 시간이었는데도 – 선생님의 답장 문자가 왔다.

 

둘리양이 규칙을 어긴 것을 솔직하고 용감하게 시인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둘리양은 이미 이 대회의 우승자입니다.

나는 그런 둘리양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라고…

 

아직 어린 1학년 아이에게 일어난 윤리적인 문제를 교사가 속단하거나 일방적으로 결론내리지 않고 학부모와 상의하고 아이가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셨던 이 일은 위의 고학년 아이들의 전교 대회 진행 방식이나 코드 그레이 사건과 대비가 되는 일이었다.

교사라면 이 정도로 아이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9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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