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둘리양 학교의 인터내셔널 나잇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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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쯤 전에 둘리양의 중학교에서 모든 학부모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11월 9일 목요일 저녁에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니 가급적 많이 참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버지니아 공대의 학생과 포닥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은 덕분으로 우리 동네에는 (미국 입장에서 보자면)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국적이나 인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편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한 다문화 교육이 미국 교육계 전반에 널리 이루어지고 있는데다, 동네의 특성상 외국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 한 자리에 모여 여러 문화를 소개하고 배우자는 취지의 인터내셔널 나잇 행사였다.

행사 시작 직전 모든 준비를 마친 모습

학기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무지하게 바쁜 시기이지만, 둘리양의 새로운 중학교 생활을 응원할 겸, 자랑스런 한국 문화를 소개할 겸, 나도 참여하겠다고 답장을 했다. 다른 한국인 학부모가 있는지 알아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준비하면 더욱 알찬 문화 소개를 할 수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나혼자 단독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음식을 준비해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고, 나역시 시간이 많았다면 한국 음식을 요리해서 들고 갔겠지만, 그것도 현재 내 상황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어떤 나라였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암튼 토속 음식을 준비한 테이블

바쁜 와중에 간편하게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는데, 우리 문화를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궁리하다가, 세종대왕님이 창제하신 한글을 소개하기로 했다. 영어 알파벳 보다 두 개가 적은 24개의 기호만 사용해서 그 어떤 말이라도 받아 적을 수 있다는 점을 알리기로 했다. 교육학과 교수로서 하기에도 적절한 활동인 듯 했다 🙂 내가 소장한 한국어 동화책을 고르고 (몇 권은 미국 동화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고 또 몇 권은 한복이나 한옥 등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그림이 많은 것), 한국어로 된 간판을 칼라 인쇄해서 “한국어 간판을 읽어보세요” 하는 말과 함께 전시했다. 한글을 전혀 몰라도 로고를 보면서 나이키, 맥도날드, 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즐겁게 참여했다.

인도 음식과 차를 준비한 테이블

아이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커팅기로 인쇄해서 스티커로 나눠주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는데, 집에서는 잘 작동하던 커팅기가 중학교 건물에 설치된 와이파이와 무언가 맞지 않았는지 도무지 파일을 읽어들이지 못해서 스티커 제작을 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교사 한 명이 나와 함께 앉아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동화책을 보여주고 한글 간판 읽기나 시켜야겠다… 하다가 문득 내게는 메모지와 펜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 하고 보고했던 이순신 장군 처럼, 나도 내게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ㅎㅎㅎ

와이파이 문제로 작동하지 못한 커팅기

아이들에게 자기 이름을 영어로 쓰라하고, 그 아래에 진한 싸인펜으로 그 이름이 발음되는 대로 한글로 써주었다. 내 손글씨 필체는 아직도 녹슬지 않았고, 고작 24개의 기호로 그 어떤 이름이라도 다 쓸 수 있는 세종대왕님의 위대한 업적 덕분에, 스티커 만드는 기계가 없어도 내 테이블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참여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원래는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이지만 동반한 학부모들이나 심지어 교사들 까지도 내게 와서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서 써달라고 하는 이름도 새라, 맥스웰, 등의 미국식 이름 뿐만 아니라, 아미나 (알제리 이름), 알리 (중동 아시아 이름), 악바르 (이것도 아마 중동식 이름), 그 외에 발음을 하기조차 힘든 여러 나라 방식의 이름이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이름을 말해도 비슷한 발음으로 한글로 써 줄 수 있었다.

하이테크놀러지 대신에 실력발휘를 했던 로우 테크놀러지 ㅎㅎㅎ

아프리카 대륙의 고유 부족의 언어는 문자 언어가 아니고 말로만 전해지는 언어가 많다. 중국어나 일본어로는 세상 모든 발음을 다 표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은 말을 글로 적어낼 수 있는 문자 언어이고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뛰어난 문화자산인지는 나도 미국 생활을 이렇게 오래 해보기 전에는 몰랐다), 그 어느 나라 말이라도 소리나는 그대로 적을 수 있는 편리한 기호 시스템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한국 문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덕분에,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한국어로 적힌 메모지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접착식 메모지 덕분에 이름표처럼 가슴팍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중하게 접어서 가방에 넣는 모습도 보였다.

태극기 앞에서 기념 사진

한국 음식을 소개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적은 노력으로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다. 사실 음식은 개인의 취향이 많이 작용해서, 김치나 불고기가 아무리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데 반해, 한글 이름 써주기는 앨러지 반응을 염려할 필요도 없고, 메모지가 남아 있는 한 남녀노소 구분없이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교육적이기까지 하니, 이만하면 블랙스버그 중학교 학생들에게 유익한 교육이고 둘리양에게는 좋은 엄마 노릇이었다고 생각한다.

행사준비를 하면서 한글로 된 간판과 제품 로고를 검색했는데, 정작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한글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스타벅스, 맥도날드, 버거킹, 나이키 등의 상표를 한글로 쓴 것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국의 거리에 간판이 왜 모두 영어로 써있는지, 개탄스러웠다. 외국인들은 한글로 적힌 동화책과 간판을 경이롭게 감상하고 자기 이름이 한글로 적혀있는 메모지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아들고 땡큐 땡큐를 연발하는데, 정작 한국에는 한글이 눈에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마침 출판 막바지 작업 중인 한명숙 선생님과 함께 쓰는 책이 한국어 교육에 관한 것이어서, 얼른 그 책이 출판되어서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한국어와 한글의 위대함을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023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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