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4

초여름에 시작한 프로젝트를 초겨울에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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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 참여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82쿡 에는 자랑계좌 라는 것이 있다. 그 원래 어원은, 어르신들이 모이면 모두들 자식 자랑 손주 자랑을 앞다투어 하는데, 그걸 들어주기 힘드니 자랑을 하려면 돈을 내고 해라, 하는 뜻이다. 82쿡 게시판에서도 ‘우리 아이가 대학에 합격했어요’ 라든지, ‘큰 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등의 자랑글을 올린 사람은 82쿡 은행계좌에 입금을 하라며 돈을 모으고 있다.
시작은 장난이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 계좌로 입금을 하는 회원들이 적지 않아서 매월 공개하는 계좌내역을 보면 꽤 많은 금액이 입금된다.

앞치마 재단을 위한 패턴과 종이로 만들어본 미니어쳐

그렇게 모인 돈은 매월 두번째 토요일에 후원하는 그룹홈에서 맛있는 음식을 손수 요리해서 아이들을 먹이는데에 사용하고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고 복지시설인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회원들이 식재료를 사들고 찾아가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데, 그 과정을 사진을 찍어서 후기를 82쿡 게시판에서 나누고, 계좌의 입출금 내역도 공개한다. 한두번 혹은 일이년 동안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만 해도 십 년이 넘어가니 그 한결같이 꾸준한 봉사에 존경심이 우러난다.

천을 재단한 모습

나도 자랑계좌에 후원금을 기부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배보다 배꼽이 큰 격으로, 고작 몇 만원 기부하자고 (그 정도가 내 형편에서 무리없이 할 수 있는 금액이다) 수수료를 몇 만원 내야 하는 것이 아까워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매월 올라오는 봉사 후기 글에 댓글로 감사하다 수고했다 하는 말을 쓸 뿐이었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매월은 못해도 한 번쯤은 직접 가서 요리 봉사를 했을텐데… 하는 생각도 했다.

시침질로 주머니 위치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날 봉사후기를 읽는데 회원들이 입고 있는 낡은 앞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먹일 음식은 한우 갈비, 전복, 등등 최고급 재료를 아낌없이 요리해서 준비하지만, 앞치마 하나는 개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낡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 앞치마는 봉사하는 그룹홈에 보관하고 매월 참여하는 봉사자들이 입는다고 했다.

실제 바느질을 하기 전에 시침질로 바느질 자리를 정해두었다.

그리고 또 어느날 조앤스 패브릭 이라는 수예용품 가게에 갔다가 세일을 하는 톱톱한 천을 발견했다. 원래는 야외용 쿠션이나 야외 테이블 커버를 만드는 용도인데 그래서 천이 너무 얇지 않고 어느 정도 방수도 되는 천이어서 이것으로 앞치마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천은 야드 단위로 파는데 1야드는 1미터와 비슷한 길이이다. 눈짐작으로 1야드에 앞치마 한 개가 나올 것 같아서 6야드를 사왔다. 그건 무려 1년 전의 일이다.

6개월 만에 완성한 앞치마 여섯 벌

천만 사다 놓고 살기 바빠서 건드리지도 못하다가 지난 여름 방학이 시작했을 때 디자인을 정하고 재단을 했다. 테스트삼아 첫 한 벌을 만들기도 했다. 여름 내내 계속해서 완성하면 좋았겠지만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고 여름 학기 두 과목을 가르치고 하다보니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추수감사절 방학을 맞아 이틀 정도 집중해서 마침내 토요일 밤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커팅기로 오려낸 스티커

앞치마 여섯 벌을 다 만들고 커팅기로 82쿡 로고도 만들어 붙였다. 재봉틀 성능이 좋아서 사용하기 편리했지만 내 솜씨가 서툴러서 바느질 선이 삐뚤빼뚤해지거나 잘못 바느질을 해서 뜯어내고 다시 하기도 했다. 나보다 솜씨 좋은 회원이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원봉사에 나만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82쿡의 로고를 스티커로 만들어 다림질로 붙였다.

크로스백 스타일로 만들어서 윗도리를 입듯이 머리와 팔을 끼워넣으며 입으면 따로 끈을 묶거나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회원의 다양한 신체 사이즈를 고려해서 조금 크게 재단한 것과 조금 작게 재단한 것을 섞어서 다양하게 만들었다.

음식 자원봉사를 하는 회원에게 보낼 것이어서 자원봉사팀 이라는 뜻으로 squad 라는 문구도 넣었다.

82쿡 회원 중에 나와 따로 연락을 하는 분께 연락을 해서 그 댁으로 앞치마를 부치기로 했다. 그 회원은 거의 매월 봉사에 빠지지 않고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봉사단의 맏언니 같은 분이어서 부탁을 한 것이다.

모델에게 입혀본 모습
뒷모습은 이렇게 생겨서 끈을 매지 않아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이번 추수감사절 방학은 김장도 하고 앞치마 프로젝트도 완성하고, 또 한국에서 출판할 책의 원고도 제출하는 등 무척 알차게 보내어서 기쁘다.

한국으로 배송할 준비 끝!

2023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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