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아줌마들은 갱년기가 되어 깜빡깜빡 뭘 잘 잊어버리는 증상을 포기 브레인 (foggy brain) 이라고 부른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마냥, 기억이 뿌옇게 흐려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나는 50세가 되면서 이른바 갱년기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불면증이나 홍조 열감 등의 흔하고도 불편한 증세는 전혀 겪지 않았지만, 기억력이 둔화되고 있다는 것은 실감하고 있다.

갱년기가 되면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분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데, 에스트로겐은 뇌세포의 신경전달 물질과 연결 구조를 돕는 일도 한다. 즉, 바꿔말하면 내 두뇌 세포가 헐겁게 연결이 되어있는 상태인 것이다.
뉴런이라고 부르는 뇌세포는 신생아일 때부터 서로 연결망을 형성하는데 만 3세가 되면 어른의 연결망 (시냅스라고 부름) 숫자 만큼이나 늘어난다. 두뇌의 크기도 어른의 90퍼센트 크기로 자라난다. 이래서 생후 첫 3년이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들 말하는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는 나이가 되면 이 연결 구조는 어른의 두 배가 되는데, 너무 많은 연결 구조는 집중과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학습을 하는 동안에 조금씩 불필요한 연결을 가지치기 한다. 그러다가 갱년기가 되면 노화된 연결 구조가 더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기억력 감퇴 같은 두뇌의 둔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둘리양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내일 뭐해먹지?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일요일인데 코난군과 둘리양의 오케스트라 연습이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시작하는 날이어서 아침 겸 점심 요리를 해먹이고 저녁 메뉴도 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저녁에 굳이 식재료 장을 보러 가기는 싫고 해서 집에 있는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를 떠올려보았다. 두부와 스팸을 넣은 김치찌개는 일요일 저녁에 해먹이고, 브런치는 너무 진한 냄새가 나지 않는 감자 요리를 하기로 했다. 둘리양도 두 가지 메뉴가 다 마음에 든다고 했다.

계속 차를 몰다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문득 내일 무슨 요리를 하기로 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둘리양과 함께 내일 뭐해먹지? 이거랑 이거 어때? 오케이! 하고 대화를 했던 사실은 생생히 기억나지만 (당연하지! 고작 몇 분 전에 했던 대화인데…), 아침 겸 점심으로 뭘 요리하기로 했던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둘리양에게 물어보면 간단히 답이 나오겠지만, 두 가지 이유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첫째는 둘리양이 엄마의 노화를 걱정할까봐 였다. 우리 엄마가 늙어서 이런 것 조차 기억을 못하다니 하고 충격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이유는, 열심히 두뇌를 움직여서 내 스스로 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아주 간단하고 조금 전에 떠올랐던 생각이 캄캄한 암흑 속에 빠져서 생각이 나지 않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 때 마다 감퇴한 기억력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기억해내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메뉴를 고를 때 장을 보러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요리를 떠올렸었지… 그러면 우리집 냉장고나 팬트리 안에 있는 재료로만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었을거야…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러 가야하니 강한 냄새가 나는 김치찌개는 저녁에 먹기로 했었지… 그러면 브런치 메뉴는 아마도 미국음식이었을거야… 우리집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는 뭐가 있지? 치즈, 베이컨, 감자…

유레카! 감자를 쪄서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베이컨과 치즈를 넣고 에어프라이어로 조리하는 포테이토 스킨을 만들어 주기로 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런식으로 자꾸 두뇌를 가동해서 열심히 생각 연습을 하면 신경세포 연결이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신경전달 물질이 전달되는 속도가 올라가기도 한다고 한다. 치매 예방에 고스톱 화투 놀이가 좋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는 뜻이다 ㅎㅎㅎ
최근에 나는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는 대신에 김복준의 사건 속으로, 사건의뢰, 그것이 알고 싶다, 용감한 형사들 등등의 범죄 현상을 분석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즐겨 시청하고 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쩐지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재미있어졌다. 그런데 그게 아마도 나도 모르게 내 두뇌를 운동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범인이 이런 흔적을 범행 현장에 남겼다는 것은, 그 범인이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렇다면 용의자 범위를 이렇게 좁힐 수 있다… 하는 식의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동안, 내 일상의 일도 같은 방식으로 추리하게 된다. 위의 감자 요리를 떠올릴 때도 도무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 기억을 잡아당기려고, 관련된 모든 사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고, 그 방법이 성공을 했다.
기억력은 다소 감퇴하더라도 분석력과 판단력은 훈련으로 오히려 더 좋아지고 있으니 갱년기를 지나 노년기로 가더라도 서러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2025년 9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