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1

나의 사랑이 이렇게 시작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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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감상기 [라 보엠]
2002년 11월 10일 4시 허드슨 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공연

오페라 라 보엠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많이 알려진대로, 여주인공 미미가 병으로 사랑하는 사람 (가난한 시인)을 두고 저세상으로 떠난다는 비극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 찾아 삼만리’보다는 ‘딱따구리’를 더 좋아했던 명랑소녀(!)였기에 라 보엠에서도 3, 4막 보다는 1,2막이 더 좋았다. 특히 제 1막에서는 남녀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잘 엿볼 수 있다. 손꾸락에 침발라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살짜~기 그들의 연애기를 살펴보자… 아마 누구라도 이와 흡사한 사랑의 과정을 한 번쯤 겪은 적이 있으리라…

단칸셋방에서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홀애비 냄새 물씬 풍겨나는 자취생활을 하는 로돌포에게 미미가 찾아온다. 미미역시 이웃 셋방에 살고 있는, 자수를 놓아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딱히 별볼일 없는 가난한 여인… 그 날의 방문 목적도 수를 놓기 위해 방을 밝힐 촛불을 빌리러 온 것이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화려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는,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보통 사람들의 가난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오페라들과 달리 가난하고 아무 것도 아닌 라 보엠의 주인공들이 좋았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왕자와 공주의 전설이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흑심을 품은 로돌포는 자신의 촛불을 일부러 꺼트리고 미미가 흘린 열쇠도 감춰두고 수작을 건다… 여기서 사랑의 제 1단계 “수작걸기”가 시작된다… 순진한 미미는 로돌포의 계략에 넘어가 수작에 걸려드는데… 여기서 미미는 순진해 보이지만 사실은 손오공을 손아귀에 쥐고있는 부처님처럼 로돌포의 그 모든 전략을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던 것이니… 여자들의 내숭은 만국공통인 것인지…ㅎㅎㅎ

자, 그리고 사랑의 제 2단계 “불꽃 튀기기” 기대하시라, 으라라라라~
열쇠를 찾는다는 핑계로 어둠 속에서 마룻바닥을 더듬다가 두 사람의 손이 만나는 순간. 남북한 정상이 두 손을 맞잡는 것 이상의 짜릿짜릿한 전율이 신경세포 줄기를 타고 대뇌인지 소뇌인지 어디로 흘러들어 교감신경을 괴롭히고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며 어쩌구 저쩌구 하여튼 난리가 난다… (나도 그랬다… 히히히) 이 때의 그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을 부르는데… 그 감미로운 테너 보이스에 나도 잠시 우리들의 연애시절을 회상하며 씨~익 웃었다… 히…

제 3단계 “서로를 알아가기”가 다음 순서
로돌포는 자신이 가난한 시인이지만 예술의 세계에서 꿈꾸는 동안만큼은 누구 못지 않은 부자가 된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미미에게도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졸라댄다. 미미는 자기 이야기는 별 것 없다고 좀 빼는 듯 하더니, 장미와 백합 수놓기가 가장 즐겁고, 언제나 봄날을 꿈꾸며 살아왔노라고 노래한다 그 유명한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로…

사랑하기 위해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저 남자 직업이 뭐고 한 달 수입이 얼마인지 파악한다는 것은 아닐게다. 또한 저 여자가 실제로 쭉쭉빵빵인지, 처가집 빽이 든든한지 살펴보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저 사람의 꿈은 무엇인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인지 그런 것들을 알아가면서, 한편으론 상대방의 꿈과 이상이 나의 것과 어울리는 것인지 짱구를 굴리면서 그렇게 우리들의 사랑은 서서히 다음 단계로 구렁이 담넘듯 넘어가지 않았던가…

제 4단계… 크흐흣 “도장찍기”
두 사람의 열렬한 키스와 함께 제 1막은 그야말로 막을 내린다. 제 2막에서도 이 도장찍기는 계속되는데, 두 사람끼리만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서로 ‘넌 내 꺼’라는 도장을 마구 찍는다. 이 과정에서 선물도 사주고 데이트 비용도 쓰고… 돈이 좀 든다. 그래도 비단장수 왕서방마냥 돈이 없어도 띵호와 띵호와 마음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내 감상문은 여기까지만…
3막과 4막에서의 사랑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의 전반부에서 사랑의 아름답고 긍정적인 면만을 보여주었다면, 후반부에서는 사랑이 때로는 얼마나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해서 의심하고 싸우고 숨막혀 하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한다… 푸치니는 작품의 극적 완결성을 위해 이렇듯 사랑의 양면을 다 보여주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1막과 2막처럼 아름답고 즐겁기만 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양념: 그 날의 미미는 죽을 병에 걸린 환자치고는 아주 심하게 건강(?)해 보였다… 아름다운 노래와 가녀린 몸매, 이 둘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자석의 양극이던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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