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박교수님,
제가 어젯밤부터 독감을 앓아서 오늘 수업에 결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이 네 번째 결석이라서, 교수님의 출결 점수 정책에 의하면, 제 학기말 성적이 무조건 B 이하로 떨어지게 됩니다.
(요기까진 정중한 척 했다)
아파서 결석할 경우에 의사 소견서를 가져오면 면제가 되지만, 저는 건강보험을 구입할 돈이 없어서 소견서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 점수를 깎는 것은 아주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진작에 찾아와서 의논을 하지 그랬니? 그리고 학교 보건소는 공짠데 왜 안갔었니?)
교수님은 다음 주 학회 참석 때문에 사흘이나 수업을 취소했지만, 그렇다고 월급이 깎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아파서 결석한 것의 댓가로 학점을 깍는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수업 취소는 세 번이 아니고 두 번이란다, 얘야. 그리고 만약에 수업취소가 불만이면, 다른 교수한테 부탁해서 대신 수업해 달라고 할 수도 있어. 근데 그건 싫지? 그리고, 학회에 참석 하는 것도 내 업무중에 하나거든? 뭐, 그건 그렇다치고, 도대체 내 월급과 니 학점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니?)
제 상황을 고려해 주신다면 무척 감사하겠고, 그래도 제 점수를 깎으신다면, 그건 아주 많이 불공정한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개강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출결처리에 대해서 수십 번은 족히 공지하고, 확인시키고, 주의주고 그랬는데 이제 와서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다니… 너의 뒷북의 끝은 도대체 어디란 말이냐?)
이메일을 읽는 내내, “뭬야? 이런 고이얀 것 같으니라구!”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위에 괄호안에 쓴 것처럼 대응했다간 감정싸움으로 번져서 수습이 불가능해질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아마 내가 티칭 경험이 많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 학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나, 대학원 조교시절 눈물콧물 흘려가며 쌓은 경험이 있는지라, 일단은 그 메일을 바바라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요런 괘씸한 학생이 하나 있습니다, 하고 알린 후에 짧은 답장을 썼다.
홀리야,
니가 몸이 아픈데 보험이 없어서 병원엘 못갔다고 하니 참으로 유감이구나.
학교 보건소로 가보렴. 거기는 보험없어도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거기 의사 선생님이 써주시는 소견서를 가져오면 니 네번 째 결석이 면제되어서 학기말 성적에 아무런 차질이 없을것이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전장으로 던지며)
니 결석 문제에 대해 더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니 몸이 회복되는대로 내 방에 들르렴.
박교수가
그랬더니 요 맹랑한 녀석이 오늘 나를 만나러 왔었다. 얘기를 좀 나눠보니, 작년에 인테리어 디자인 학과를 졸업했는데, 교사자격증을 따려고 다시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학생이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대학이나 교수가 만만해 보이는 그런 입장이었던가 보다.
게다가 2년을 추가로 더 대학을 다니자니 돈이 쪼달리는 것도 사실이고, 처음 한 두 번 아파서 결석할 때는 교수 찾아가서 궁색한 변명 늘어놓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넘겼는데, 막상 성적에 지장을 줄 만큼 수업을 빠지고나니 걱정도 되고 짜증도 났었던가보다.
순진한 1-2학년 학생이면 대번에 나를 찾아와서 의논을 했을텐데, 지딴엔 그 나이에 누구에게 아쉬운 소릴 늘어놓기가 자존심도 상했겠지…
아, 물론 엄살이나 꾀병도 아주 약간은 있었겠지…
암튼간에…
미국 의료시스템의 후진성에 대해 살짝 토론해 주고, 교사의 기본 덕목중의 하나가 건강이라는 원론도 한 번 짚어주고, 나역시 니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낮은 학점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며 안심을 좀 시킨 후에, 니가 그 날 아팠다는 것을 증명해 줄 그 어떤 것이라도 가져오면 그 날의 결석을 면제해 주겠다고 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 날 내 메일을 받고 보건소에는 갔는데, 처방전은 받았으나 약을 살 돈이 없어서 그냥 깡으로 버틴다고 하길래, 그럼 그 처방전을 가져 오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약도 못먹고 그렇게 아팠다니… 정말 내 마음이 아프구나.”
(한 번 더 “너와 나는 서로 적이 아니야” 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안그러길 바라지만, 혹시라도 니가 또 아프게 되면, 그 때도 처방전이라든지, 룸메이트의 증언 편지라든지, 뭐라도 증빙 자료를 가져오면 결석을 면제해 줄께.”
(통역하자면, “뻥치고 결석하려면 댓가를 치루어야 한단다. 그렇게 구차하게 거짓말 자료 수집하느니, 그냥 결석안하고 마는게 좋겠지?”)
그렇게 마무리를 해서 학생을 돌려보냈다.
휘유~
대학생을 대할 때, 전에 내가 가르치던 유치원생들에게 써먹던 방법이 먹힌다는 것이 다행인지 비극인지…
떼부리고 말안듣는 아이들을 나무라고 다그치면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 어른도 아이도 감정이 상하고, 상처뿐인 승리가 어른이나 아이 둘 중 하나에게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다.
둘 다 이기려면, 일단 어른이 감정을 추스리고, 떼부리는 아이의 내면 심리를 파악해야 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하는 것을 어느 한도 내에서 내가 들어줄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이성을 회복할 시간을 잠시 준 후에, 우리는 한 편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둘 다의 승리를 위해 협상을 한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협상 결과에 만족해 할 때,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확실하게 심어주고 마무리!
그래… 대학생은 코도 안흘리고, 오줌도 안싸고, 이메일도 읽고 쓸 줄 알고… 유치원생 보담은 훨~씬 낫지…
우치원 선생님보다 대학교수가 더 쉬운 직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