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2

아가야, 세상은 이렇게 개척하며 사는 게 제맛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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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결혼한지 어언 6년만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학위 마치고… 직장 잡은 다음에… 집부터 사고… 둘이 함께 살게 되면… 그렇게 미루고 기다리던 프로젝트 하나를 이제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피임만 안하면 저절로 아이가 생길 줄 알고 여름방학 후반부에 맞추어 출산일을 잡아보았으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아이는 겨울방학이 시작하는 12월 둘째 주에 태어나도록 스케쥴이 잡혔다.

여름학기 강의하는 3주 동안에 약간 피곤한 것 외에 별다른 입덧 증상이 없어 다행이다 했더니, 강의를 마치고 여유롭게 페이퍼를 좀 써볼까 하는 4개월 즈음에 뒤늦은 입덧이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만 먹어도 토한다는 심한 임산부들에 비해 증세가 가벼워서, 차멀미처럼 속이 울렁울렁하고 느끼한 음식이 싫어지고, 식사량이 줄어들고, 식후에 소화가 잘 안되어 불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속이 불편하다보니 입에 맞는 음식이 별로 없고, 그래서 굶으면 미식거림이 더욱 심해지니 뭔가를 찾아서 먹어야 하는 딜레마…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 트림을 꺼억꺽 해대며 오늘은 뭘 먹으면 속이 좀 가라앉을까 고민하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린 나에게,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 남편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 ‘뭘 먹을지, 뭘 입을지 걱정하지 마라’ 도 별로 도움이 안되었다.
(이 성경 구절은 주로 내가 ‘오늘 저녁 반찬은 뭘로 할까요?’ 하고 물으면 남편이 대답대신 자주 써먹는 말이다. 정말 도움안된다…)

하얀 쌀밥을 설렁탕 국물에 말아서 새콤하고 아삭한 깍두기와 함께…

꿈깨자… 블랙스버그에는 설렁탕은 커녕, 한국음식 재료를 살만한 곳도 여의치 않다. 설렁탕을 먹으려면 4시간 운전해서 페어팩스 한인타운으로 가든지, 아니면 우리집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사골을 고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그래서 월마트에서 쇠고기를 사다가 국을 끓여 먹었다.

바삭바삭하게 튀긴 새우튀김…

동네 일식집에 가면 새우 튀김 두 개에 다른 야채 튀김 몇 개 섞어서 나오는 전채요리가 세금내고 팁 포함해서 10 달러 정도 하는데, 남편과 둘이 가서 에피타이저 하나만 먹을 수도 없고, 두 사람 몫을 시켜도 정작 새우는 네 개밖에 먹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푸드 라이온 (집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에 가서 생새우 5 달러 어치 사다가 집에서 튀겨 먹었다. 바삭바삭하니, 아주 맛있었다.

그리고 또 먹고 싶었던 것은 참기름 친 배추겉절이 김치…

남들은 임신하면 남편한테 구해오라고 시키고, 애써서 구해오면 이젠 먹기 싫어졌다며 투정을 부린다는데, 그건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더운 여름 내내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강의를 하는 남편에게 왕복 여덟 시간 운전해서 배추겉절이를 사오라고 시킨다는 건, 임신한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를 훌쩍 뛰어넘어 부부간의 신뢰와 예의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추를 사다가 내손으로 김치를 담궜다. 하늘이 도왔는지 양념이 아주 맛있게 되어서 참기름 듬뿍 쳐서 잘 먹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뭐, 좀 거창한 듯 하지만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내 힘으로 개척해 내었다는 자부심과 나의 강인한 의지력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세상이 다 내가 원하는대로 돌아가면 삶이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했을까…?

이렇게 계속되는 도전과 그걸 어찌 이겨나갈지 궁리하고 실천하는 재미가 진정 삶의 참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맘대로 태교복음 1장 1절 말씀:
아가야, 세상은 이렇게 개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네 삶을 보다 재미나게 해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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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연

축하축하합니다. ^^ 드디어 나도 친구가 낳아주는 조카를 보겠구낭…항항항
국내에 있는 친구라는 이들이 하나같이 너무 잘나서 시집들을 안가는 통에 한 녀석도 못보고 있잖니.^^
가까이 있으면 음식도 해다 나르고, 이것저것 챙겨줄 수 있어 좋으련만…
먹고싶은 음식들의 목록이 왜 이렇게 내 맘을 짠~~하게 만드냐..

내가 겪어보니 보영아..
가장 좋은 태교는 엄마가 행복한 것이었다.
커피..정말정말 나쁘지만 너무 먹고 싶어 슬퍼지려고 하면 그냥 한잔 타서 한모금 마시고 냄새 실컷 맡아보고 버려. 그러면 되는거야.

초산이 늦어서 이런저런 걱정이 많겠지만 네가 기도 많이 하고, 또 늘 행복하게 생활하면 건강하고 예쁜 아기 낳을거야. 늘 몸조심. 잊지마시고.
이 기쁜 소식을 전국에 퍼트려주마. ^^ 엄마가 가끔 물으셨었거든. 너 애기 소식 없냐고..^^
울 엄마가 무늬는 네 친정엄마 아니시냐. ㅋㅋㅋ
나도 멀리서지만 너 고생 덜하기를, 건강하게 건강한 아기 낳기를 기도할게. 화이팅이다. !!!

보영

연아 오랜만이다!
화이팅 고맙고…

태교는 뭐… 이 세상에 나오면 배우고 공부할 거 디~게 많을텐데, 뱃속에서라도 편하게 지내라고 따로 안하고 있다. ㅎㅎㅎ

가끔 연락좀 서로 하고 살자꾸나!

참, 종훈오빠는 미국에 다시 근무 나올 일 없다니? 예전에 어쩌면 아틀란타 쪽으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선종연

아직은..확실한 소식 없던데. 가끔 그런 말이 오가기는 하나보더라. 연락좀 하고 살자. 너무 무심한거 아니냐? –*

최정아

보영아. 좋은 소식 넘넘 기쁘다. 축하해. ^^ 넌 입덧을 해도 너 답게 잘 헤쳐나가고 있구나. 멋진 친구다! ^^ 진짜로 많이 축하한다.

보영

어머, 정아야 네가 남긴 댓글을 이제사 보았네.
잘 지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