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4

영민 엄마의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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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메모리얼데이 휴일에 영민 아빠 친구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가족 캠핑이 있었다.

장난감 텐트에서 놀이하기 좋아하는 영민이가 재미있어할거란 생각에, 여름 학기 강의로 분주한 와중에 시간을 내어 1박 2일로 캠핑에 다녀왔다.


처음 캠핑장에 도착해서 얼마간은  ‘여기가 어딘가?’ ‘저 사람들은 누군가?’ 하는 어리둥절함 때문에 분위기 탐색을 열심히 하던 영민이가, 유근이를 보더니 기분이 좋아져서 함께 뛰어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시간을 쪼개서 오기를 잘했구나 하고 흐뭇해 하는 것도 잠시…

유근이 캠핑 의자에 달린 장난감 우산을 서로 갖겠다고 둘이서 다투는 것을 시발점으로, 영민이는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유근이도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마침내 두 엄마가 아이들을 서로 떼어놓고, 문제의 우산은 안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어른들은 거기서 문제가 끝난줄 알았다…


허나, 기분을 잡친 영민이는, 피곤하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환경이 낯설고 싫은데다, 엄마 아빠가 다른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충분히 주지 않으니 본격적인 떼쓰기 모드로 돌입한 것이었다.


잘 갖고 놀던 버즈와 우디 인형을 던져버리고는 엄마가 그걸 주워줘도 울고, 의자에 내려 놓아도 울고, 울음을 달래느라 안아줘도 울고, 내려놓아도 울고, 팔다리가 너무 아파서 영민이를 안은채로 의자에 앉았더니 또 울고, 아빠가 와서 말을 걸어도 울고, 울고, 또 울고…


그 와중에 넘의 집 아이들을 보니, 영민이 또래 나이이지만 가리는 음식 없이 아무거나 잘 먹고, 엄마와 멀찍이 떨어져서도 잘 놀기만 하는데… 나는 팔이 빠지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영민이의 떼를 받아주노라니, 정말이지 화가 치솟아서 머리 뚜껑이 열리려고 했다. 영민이 아빠가 뭘 좀 어찌 해보려고 가까이 오기만 해도 영민이의 떼는 더욱 심해지니, 아빠의 도움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러다보니, 저녁밥은 먹은둥 마는 둥 – 물론 영민이도 저녁식사를 거의 못했다 – 야식으로 먹음직스런 떡볶이와 오뎅꼬지가 나오고, 모두들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에 나는 텐트 안에서 영민이를 째려보고 있어야만 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왜이리 엄마만 괴롭히는지… 아빠랑 하이킹도 하고, 목욕이며 온갖 시중을 아빠가 다 들어준다는 유근이네가 부럽고… 그래서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놓고, 유유자적 즐기는 유근이 엄마가 부럽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나만 맨날 영민이랑 씨름할 동안에 혼자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영민이 아빠가 미워지고… 


그렇게 회한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대한민국 국방부 시계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숲속 캠핑장에도, 육아에 지친 여인네의 삶에도 언제나 새로운 태양은 떠오르고, 새로운 날은 시작된다.


푹 자고난 영민이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유근이와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유근이가 아주 사소한 일로 심통이 나서 근 한 시간을 울어댄다. 내가 부러워했던 유근이 엄마가 이번엔 땀을 뻘뻘 흘리며 유근이를 달래고 있다.


그래… 난 바보다.

강의 노트엔, 두 살에서 세 살 사이 연령의 아이들은 확고한 자아개념을 바탕으로 독립심을 키우려고 일부러 부모 말을 안듣고, 하면 안되는 행동인 줄 알면서 일부러 더 한다고 써놓고, 또 그런 반항심이 정상적인 발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열강해 놓고서는, 정작 그 실제 사례 앞에서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 개개인은 모두 개인차가 있어서, 어떤 아이는 밥을 잘 먹고, 어떤 아이는 까다롭고, 어떤 아이는 낯가림이 전혀 없고, 어떤 아이는 심한데, 중요한 건 그런 개인차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논문도 쓰고, 강의도 하고, 그런 걸로 밥벌어 먹고 사는 인간이, 유근이와 영민이를 비교하면서 열받아 했던 것이다.


오늘은 강의 준비를 하다가, 엔젤맨 신드롬 이라는 발달 장애에 관해 읽게 되었다.

유전자 질환인 엔젤맨 신드롬은 어찌보면 자폐증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데, 신체 조절 기능이나 사고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언어장애나 기관지 질환이 동반되지만, 딱히 치료법은 없는 희귀병이다.


그 아이들의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새삼 엊그제 영민이에게 화났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적으로 그 나이에 해야할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인 영민이에게, 잘한다고, 고맙다고 말하지는 못할 망정, 화를 내다니…

그것도 그 분야의 이론과 실제에 ‘빠삭’ 하다고 인증받은 ‘박사’ 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와 민족앞에서, 그리고 영민이 앞에서 잘못한 일이라 여겨져서 이렇게 반성문을 남긴다.


그리고 첫 캠프에서 배운 교훈 몇 가지도 기록해 둔다.


1. 다음 캠프는 우리 가족 끼리만.

영민이는 낯선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압도감을 느껴서 쉽게 피곤해 한다.


2. 영민이가 좋아하는 활동은 엄마 아빠와 함께 노는 것.

달팽이나, 꽃, 신기하게 구부러진 나무 등은 아직 영민이의 관심 밖의 일이다.

에어 매트리스에서 엄마와 함께 쓰러지기 놀이, 후레쉬 불빛을 엄마 얼굴에 비추기, 조그만 돌멩이 던지기 놀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까지 달리기 시합 등을 추천함.


3. 아무리 영민이가 엄마 (혹은 아빠) 하고만 있으려고 해도, 엄마(혹은 아빠)가 극심하게 피곤하거나, 심적으로 분노한 상태라면 즉각적인 바톤 터치를 할 것.

서로 째려보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함께 있는 것 보다는 (영민이가 엄마한테 소리 지르는 광경은 참으로 신기하긴 했다), 잠시 서로 떨어져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실제로 이번 캠프에서, 아빠가 영민이를 잠시 데리고 있는 동안, 나도 영민이도 마음을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다.


4. 그 밖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영민이 아빠가 추가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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