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쓰는 글은 <유아교육> 에 관한 직접적인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 곳이 가장 근접한 주제의 게시판이기도 하고, 또 외국유학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이다.
어제 한국에 계신 엄마와 화상채팅을 하면서 먼 친척조카(뻘 되는 대학생)이 영어실력 향상을 위한 외국어학연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카이스트를 다닐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인데, 학교에서 영어로 하는 강의를 이해는 하지만, 질문이나 발표를 원활하게 할 정도의 영어실력이 되지 못해서 어학연수를 가고싶은데 반해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해, 어떡하면 학비를 적게 들이고, 가능하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수 있을지, 그 엄마 되는 분이 우리 엄마에게 물어보셨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얼마전에는 영어울렁증이 있는 내 막내동생이 미국어학연수를 잠시 생각해본 적도 있다. 그 녀석은 곧 다른 진로를 선택해서 열심히 가고 있기에 더이상 영어고민은 필요없을 듯 하지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어떡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미국에 온지 벌써 12년째인 나는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을까?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까지 해외여행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 유학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중고등학교 영어 수업과 대학교 교양영어 수업을 들은 것이 영어공부의 전부였다. 같은 대학생 친구들이 방학이면 미국의 친척집을 방문하거나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또 학기 중에는 종로에 있는 유명어학원을 다니는 것이 무척 부러웠지만, 어마어마한 해외여행비용은 커녕, 영어회화 학원비조차도 당시 우리집 형편에는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여차저차해서 미국유학을 결심했을 때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토플과 지알이 학원을 다니거나 교재를 사서 보는 것을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보니, 학원보다도 인터넷으로 만나 가입한 스터디그룹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그룹멤버 중에서 각종 어학원을 다녀본 사람들이 거기서 얻은 정보를 내가 공짜로 받은 덕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찾아보면 굳이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각종 영어시험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얻을 방법이 많다는 뜻이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고달픈 종일반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주말마다 공부해서 토플과 지알이 점수를 따는데 일 년여 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원과정을 마치고 입학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입학 허가를 받고난 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얼마간 시간이 있었는데 (원래 어린이집 교사를 1학기까지만 마치고 유학을 떠나려했지만 동료교사가 갑작스럽게 먼저 사직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2학기까지 근무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대학원 입학을 한 학기 연기해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일 년 동안에는 대학부설 영어회화와 작문 강좌를 퇴근이후나 주말 시간을 이용해 수강했다.
그 때 영어회화 클래스에서 맛보았던 상실감이란…
한 반에 열 명 남짓한 수강생 중에서 외국 한 번 못가본 사람은 나 혼자 뿐이고, 김치발음 그윽하게 아임파인땡큐 이상의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내 실력으로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만 더 커졌다. 토플과 지알이 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미국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존의 두려움이 생긴 것이었다.
1999년 12월 27일 밤 아홉시… 미국에서 가장 크다는 아틀란타 공항에 발을 내려놓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학원 학위는 고사하고, 학교를 찾아갈 수 있을까?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 깜깜한 우주 공간 한복판에 혼자 남겨진… 그런 느낌이었다.
다행히 선배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학교에 등록도 하고, 운전면허도 따고, 아파트를 구해서 살림살이도 갖추게 되었지만, 석사과정 수업에 들어가면 귀도 안들리고 말도 안나오는데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세 시간 짜리 강의는 어찌 그리 길기만 하던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음 주 수업 내용을 미리 예습하기가 바빴다. 한 페이지를 읽고 이해하는데 두어시간이 걸리는데, 다음 강의전까지 읽어야할 내용은 수십 혹은 백 페이지가 넘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미리 읽은 내용에 대해 토론할 때는 대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꿀먹은 벙어리이긴 했지만 지금 모두가 토론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게 되었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빛과 표정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학기말이 되어서 시험을 보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해야만 하게 되었을 때… 그 때 또 다시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교수님이나 동료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이제 겨우 알아듣는 수준이 되었을 뿐인데 이러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라는 시험 문제라든가 각종 자료를 조사분석해서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발표를 – 경우에 따라서는 한 시간 이상 길게 – 하라니,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나 이것 도저히 못하겠다고 징징거려봤자 아무 도움 안되고, 그렇게 어리광 부릴 대상도 시간도 없었다. 그냥 막, 했다. 시험이건 발표건 페이퍼 쓰기건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니면 다 태워서 먹지도 못할 것을 만들어내든 그건 나중에 나올 결과이고 그저 다음 주까지 혹은 내일까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밖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학비도 생활비도 여유롭지 못한 형편이라 그렇게 몰아치면서 수업을 들어서 일 년 반만에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내자신을 돌아보니 영어도 미국생활도 유학생활도 훌쩍 성장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알고 지내던 어학연수 과정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어학연수를 시작해서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나보다 영어를 훨씬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 년 반이 지나고보니 그들의 영어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눈물과 한숨으로 폭풍공부를 했던 내가 오히려 작문과 발표 실력이 나아져 있었던 것이다. 어학연수 과정이라고 해서 등록금이나 교재비가 결코 싼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과 나의 투자대비 효율성을 비교하면 그 차이는 아주 컸다. 일 년 혹은 이 년 동안 비슷한 액수의 등록금과 체류비를 들이는데, 한 쪽은 여전히 어학연수생이고 다른 쪽은 석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유학을 시작할 때 여유자금이 없어서 어학연수로 영어 워밍업을 해볼 엄두도 못내고 그냥 맨땅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작한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나에게 영어가 얼마만큼 절실한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어를 못하면 당장 음식을 사다먹을 수도 없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으며, 강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학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영어는 나에게 선택사양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교수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에게 유아교육 이론을 이해시켜야 하고, 학회에 가서 내가 진행한 연구를 보여주어야 하고, 학술지에 내 연구를 게재하려면 영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지금도 성문종합영어 책을 가끔 뒤적이고, 동료가 보낸 이메일 중에서 좋은 구절이 있으면 기억해두었다가 따라해보기도 하고, 운전을 하는 동안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청취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어학연수가 그리 효율적인 영어공부법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원어민들이 사는 나라에서 일 년 이상씩 체류하면 언어뿐 아니라 문화도 배우게 되는 잇점이 있지만, 단지 그것만을 위해 지불해야할 비용이 너무 크다. 더구나 지금은 인터넷으로 더욱 가까워진 지구가 아닌가 말이다. 원어민의 완벽한 액센트를 들어보려면 미국 공영방송 라디오를 실시간 무료로 들을 수도 있고, 미국 문화라면 이미 한국에도 만연해있다 (티브이 채널만 돌리면 최신 미국 드라마를 볼 수 있고 홍대앞 클럽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요즘 세대에 미국유학 준비는 정말 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어학연수과정에 있는 동료학생들은 모두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어울려 영어로 대화를 해봤자 제대로 훌륭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할 뿐 더러, 그들로부터 배울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외로운 타국생활이라며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애시당초 영어를 배우겠다는 목표를 잊어버리고 방황하기가 쉽다.
우리 동네 음식점 중에 한 곳은 매 주 월요일마다 치킨윙을 아주 싼 값에 파는 특별세일을 하는데, 월요일 저녁은 남편도 나도 저녁 강의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가 바쁘기도 하고 해서 자주 그 음식점에 가서 윙을 사먹곤 한다. 여름 학기도 모두 끝나서 한가한 대학촌이지만 월요일에 그 음식점에 가면 한국인 유학생들을 자주 보게 된다. 외로운 유학생활… 싼 값에 영양식도 먹고, 한국인 친구들과 편안하게 한국말로 수다도 떨고…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나역시 그랬다.
그런데 무리지어 식사하는 한국인 학생들은 아주 쉽게 두 부류로 나뉜다. 부스스할 정도로 소박한 차림새의 대학원생 그룹 아니면 명품가방을 들고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곱게 화장까지 한 여학생과 힙합차림으로 멋을 낸 (개인적으로 전혀 멋있어보이지 않지만서도) 남학생이 섞인 어학연수생 그룹이다. 간혹 가까운 자리에 이웃하게 되어 들리는 그들의 대화주제도 참으로 다르다. 실험실 이야기나 논문 이야기를 하는 대학원생 그룹에 비해, 무슨 비치가 놀기좋았다던지 명품쇼핑 이야기라든지 하는 주제가 주를 이루는 어학연수생들의 대화는 참으로 서로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 하다.
여기서 나는, 예쁘게 치장하는 것이나 장거리 여행과 쇼핑을 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내 자신도 가능하면 부지런해지고싶고 예쁘게 보이도록 꾸미고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이다. 다만, 그들의 대화주제에서 그들의 절실하고 당면한 현실이 드러나보인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부자라서 그깟 어학연수등록금이나 체류비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어학연수를 즐기고 영어는 천천히 배워도 된다. 한국보다 싼 값에 명품가방도 한두 개쯤 사는 것이 나쁠 것 없다.
그러나, 내 동생이나 친척조카처럼 집안형편이 넉넉지않은 사람들은 무턱대고 해외연수를 시작할 것이 아니라, 저렴한 비용으로 영어실력을 빨리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음같아서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고 싶겠지만, 외국에서 허락된 비자없이 함부로 돈을 벌다가 범법자가 될 수 있고 아니면 최소임금도 안되는 돈을 받으며 불법으로 일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법적으로 돈을 벌 수도 있고 영어공부도 가능하다는 호주의 워킹홀리데이 라는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심심찮게 브로커가 사기를 쳤다고 하는 뉴스가 보이니, 비자 규정이 훨씬 더 까다로운 미국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우리 동네 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하려면 한 학기 등록금만 4-5천 달러가 들고, 싸구려 아파트 월세와 책값과 최소한의 생활비가 한 학기 동안에 5천 달러 이상 필요하다. 일 년 이라면 그 두 배 이상의 돈이 드는데 반해, 한국에서 좋은 영어학원을 부지런히 다니면서 미국 라디오 방송을 매일 꾸준히 듣고, 미국 드라마를 자막없이 매일 한 편씩 보고, 영어로된 소설책을 매일 한 페이지 이상 읽고, 영어로 일기쓰기를 일 년 동안 한다면 미국 어학연수 십분의 일 비용으로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볼 거라고 장담한다.
그 이후에 시간과 은행잔고가 허락한다면 미국으로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 그간 독학으로 쌓은 영어실력을 실전에서 써볼 수도 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뉴욕 거리를 실제로 걸어보는 것은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자신에게 큰 상이 될 것이다.
나는 구두쇠 자린고비는 아니지만 엉뚱한 곳에 엉뚱한 지출을 하는 것은 남의 일이라도 아까운 마음이 든다. 이 다음에 꼭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도록 가능하면 주머니를 조여매고, 보다 저렴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도록 연구하고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눈에 띄는 성취를 이루었을 때는 아낌없는 상을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01년 8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