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8

출판에 관한 생각을 담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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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편집장님, 혹은 기획관계자님께

 

안녕하십니까?

유아기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한 대화법이나 질문법에 관한 책을 기획하고 계시고, 저와, 제 대학 동기이자 경기대 교수인 부성숙 교수와 의논하시려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부족한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시려 하는 점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

 

제 친구 부교수가 한국에서 이미 출판된 책 몇 권을 소개해주었는데, 목차와 책소개 글을 보니 자세한 디테일은 몰라도 전반적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31368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769303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31449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19904X

 

어떤 점에서는 부모들에게 참 좋은 책일 수 있겠지만,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또 그 이론을 바탕으로 제 아이들을 직접 키우면서 배우고 느낀
바로는
, 무언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해서 부모의 시선을 잡아 끄는 제목은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 (내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기적의 질문법? 우리 아이 두뇌를 깨우는 똑똑한
질문법
?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내용을 구성할 때 철저하게 부모의 관점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아이 두뇌를 깨우는 똑똑한
질문법 의 구성을 보면 각 챕터가 어휘력을 키워주는 질문
, 표현력을 키워주는 질문, 이런 식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가정에서 일상 생활 속의 부모와 자녀의 대화는 오늘은 너의 어휘력을 키워주겠어하고 시작하거나, ‘지금 이 상황은 표현력 증강에 도움이 되겠어하고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주제별 챕터 구성은 대학교 교과서에서 사용되면 효과적일 것입니다.


내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기적의 질문법 책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엮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아교육 전공자로서 못마땅한 점 한 가지가 있는데, 무슨무슨 어떻게 하는 법칙,
또는 이렇게 되려면 이렇게 하라’, 하는
투의 문체입니다
.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교육학 분야에서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나 방법론은
없습니다
. 그 중에서도 유아교육 분야는 연구대상의 무한한 잠재력 때문에 더더욱 개인차가 크고,
가정이나 주변 환경으로 인한 변수가 크게 작용하는데, 한국의 유아교육 흐름은
(대학이나 연구자들 간에는 그렇지 않지만, 유아교육 관련 서적이나 교구 교재 시장과
그것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  마치 어딘가에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법이 존재하고,
이 책 (혹은 교재 교구) 이야말로 그 비법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선전하여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끔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옆길로 새는 이야기 같지만, 제 남편이 물리학을 오래도록
공부했는데
, 이 사람의 연구분야에서 보자면, 많은 법칙이 존재하고 지금도
발견되고 있으며
, 그 법칙들은 어떤 누구에게라도 보편적으로 똑같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김박사가 한 실험을 이박사가 그대로 실행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만일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것은 김박사나 이박사의 실험이 잘못된 것이지
, 결코 법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물리학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구요.


하지만 유아교육은 (감히 절대로라는 말을 사용하려 합니다) 모든 아이들과 모든
부모들을 위한 단 한 가지 훌륭한 교육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교수나 저를 비롯한 유아교육
연구자들은 존재하며
, 그들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세부적인 전술을 개발해내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전략을 발견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연설명 하자면, ‘부모가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하면 교육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나,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전반적인 전략이라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을 실생활에 접목하거나, 그 전략에 의거하여 오늘의
전투는 어떤 식으로 치룰지 정하는 작전회의를 하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과 아이의 특성과 부모의 성향과 다른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서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


예를 들자면, 맞벌이 엄마와 전업주부 엄마가
아이와 대화하는 시간과 상황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 아이가 시각적 학습을 더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청각적 자극에 더 예민한지에 따라 대화의 방식과 주제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

글쎄요이렇게 쓰다보니, 그럼 도대체
어떤 책을 쓰고 싶은거냐
? 네 주장 대로라면 부모를 위한 대화법에 관한 책을 쓸 필요가 있긴 한거냐?
하는 질문이 제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에게 하는 대답은, 어찌보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부모들에게 물고기를 가져다 바치지 말고, 낚싯대를 쥐어주자는 것입니다.
손톱 밑의 티끌을 가지고 요럴 땐 요렇게 하고 조럴 땐 조렇게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부모 각자가 강물과도 같은 큰 그림을 품고, 거기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노력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 그런 책을 쓰고 싶습니다.

어쩌면 마케팅이나 한국 출판계의 흐름을 전혀 모르고 하는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박 보 영 올림 

 

2012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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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

안녕하세요, ‘베이비트리’ 게시판에서 글 보고 찾아왔는데, 제법 시일이 지난 글이지만 요 글이 제 관심을 확, 잡아 끄네요. 그래서 좀 뜬금없지만 여기다 인사 남깁니다. ^^ 저는 베이비트리에 정기적으로 글 쓰는 사람 중 한 명인데요, 제가 딱 이런 생각을 하고서 한국 육아서 시장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거든요. 특히 무엇이든 아이들의 ‘공부’ ‘학습’ ‘지능’ ‘창의력’ 으로 연결지어버리는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라고 보고 있구요. 그런데 베이비트리에 글 쓰면서 보니 그게 꼭 출판 시장만의 문제는 아니더라구요. 여전히 우리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직업적으로,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내 아이가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고, 출판 시장은 그런 바람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가이드 북’ 류의 육아서를 쏟아내죠.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공부를 잘 해야만, 그래서 ‘좋은’ 직업을 가져야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공부를 못 해도,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선 이런데 대한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 그래서 사회를 그런 방향으로 바꾸어내어야, 우리가 아이들 저마다의 흐름에 맞춰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음..이거 제가 조만간 다음 글로 쓰려고 생각하고 있는 주제인데 여기다 이러고 있네요 ㅋ)  

 

그런데, 이 편지 실제로 저 해당 출판사에 보내신건가요?

답이 있던가요? 후속편이 궁금하네요. ^^ 

소년공원

어머나, 케이티 어머님을 여기서 뵙다니 반가워요!

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한겨레 베이비트리 에서 케이티 이야기 꼬박꼬박 읽고 있거든요 🙂

미국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에 저도 깊이 수긍하고 공감하는 팬이랍니다.

 

저 글은 보시다시피 2012년에 친구와 뜻을 모아 책을 한 번 써보자고 의기투합하고 호기롭게 썼던 글인데, 그 당시 출판 시장이 일단 대선이 끝날 때까지는 올스톱! 이런 분위기였어요.

그리고 멘탈이 붕괴되는 대선 결과…

다른 모든 경기가 그렇듯 출판계도 얼음왕국처럼 얼어붙어서 출판은 물건너 가버린 꿈이 되었지요.

요즘은 책 쓰는 게 뭐 대순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요.

어쩌면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좋은 책을 쓰고싶다는 생각보다 더 크지 않았던가 반성도 하면서요.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정말로 아이엄마들에게 해주고픈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은데…

정권이 바뀌면 그 꿈이 이루어지려는지…

정권이 바뀌기는 하려는지…

ㅎㅎㅎ

그래도 희망은 항상 품고 살아야겠죠?

 

암튼, 정말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