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사범대에서는 해마다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지급한다. 물론 연구기금을 그냥 모두에게 무조건 주는 것은 아니고, 기금 신청서를 양식에 맞추어 잘 써서 제출하면 학장님과 다른 심사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선발된 교수에게만 수여한다.
나는 두어 번 그 연구 기금을 받았던 적이 있고, 올해에도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자료를 모으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한국의 유아교육 잡지에 기고하는 것을 위해 컴퓨터를 새로 받는 것이 기금신청의 주요 목적이었고, 첨부자료 (다음세대 잡지와 계약서) 를 기다리다보니, 그리고 다른 업무로 바쁘게 지내느라, 마감시한인 어제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신청서를 쓰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연구 활동에 대해서 쓰고, 그 중요성과 의미를 쓰고… 한 절반 정도 분량을 채웠을까? 싶을 즈음에 문득 신청서 작성 요령 문건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제출마감일이 하루 전에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알았다. 아뿔싸, 이런 실수를 하다니! 너무 바쁜 일정에다 지난 주 내내 고생한 감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마감일자를 헷갈렸던 것이다. 이 때 시간이 벌써 오후 두 시였고, 내 안에서 두 가지 다른 생각이 만화의 한 장면처럼 내 양쪽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에이, 마감 시한도 이미 지나버렸고, 연구기금 신청안한다고 교수로서 내 업적이나 성과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이제 두세시간 있으면 퇴근시간인데, 공연히 힘빼지 말고 책상 정리나 하고 일찍 집에갈 준비나 하자!”
“하지만, 이걸 쓰려고 그동안 준비해온 것들이 너무 아깝잖아? 한국 잡지사랑 연락해서 받은 계약서 (그걸 일부러 만드느라 편집기자가 수고해주었는데) 와 문헌연구를 위해서 틈틈이 모아둔 저널 아티클이 무용지물이 되는 건데. 그리고 오늘 이 시간까지 밥도 안먹으며 써온 신청서 절반은 어떡하고? 연구기금을 받아서 근사한 새 컴퓨터를 쓰게 되리라는 꿈도 산산조각이 나는 건데… 그러지말고,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한 번 해보는게 어때?”
그리고 나는 평소처럼 “갈때까지 가보고, 할때까지 해보는” 쪽을 선택했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말도 이 때에 해당한다.
급하게 학장님께 이메일을 보내서 마감시한이 하루 지났지만 신청서를 제출해도 되는지 여쭤보았으나, 늘 바쁜 학장님이 그걸 즉시 읽고 답장을 해줄 수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쓰던 신청서를 인쇄하고, 잡지와 계약서를 들고 직접 학장님 방으로 찾아갔다. 하늘이 도왔는지 학장님은 외부에 나가있지 않고, 연구실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교수들을 대하는 학장님의 편안한 얼굴을 보는 순간 더욱 용기가 생겨났다.
정말로 언제나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팻 슈메이커 학장님 🙂
“학장님, 지금 단 1분만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구기금 신청서를 오늘까지인줄 알고 지금껏 쓰다가, 어제 지나가버린 것을 알았다. 여기까지 말을 꺼내자 학장님은 하루 늦어도 괜찮으니 제출하라고 하셨다. 거기서 일단 “예쓰~” 하고 마음속으로 주먹을 쥐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신청서가 제출하면 가능성이 있을까요?” 왜냐하면, 교수들의 연구활동이란 주로 학술지에 게재되는 학술논문을 지칭하는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잡지에 칼럼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연구활동이 아니야’ 하고 거절하려면 얼마든지 거절당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국제적인’ 저술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내 연구활동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보내온 잡지에 떡하니 박힌 래드포드 대학교의 이름과 내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행히도 래드포드 대학교는 영문으로 적혀있어서 한글에 까막눈인 학장님도 대번에 알아보시고, 이런 국제적인 저술활동을 하게된 나에게 대단하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글로 작성된 계약서이지만, 숫자로 적힌 기고 계약 기간을 보여주면서 내 저술활동이 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년까지 매월 해야 하는 일이고, 따라서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의 딸리는 기능이 불편하다는 점도 설명했다.
학장님이 물으셨다. “필요한 컴퓨터가 얼마나 해요?” “고작 2천 달러요…” 내 돈으로 사려면 이백 만원이 넘는 비싼 고급 컴퓨터 이지만, 많게는 천 만원 까지 지급되는 연구비 수준으로는 ‘고작’ 이라는 점을 부각하려고 했다.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데, 고작 요만큼의 지원만 있으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요지를 전달했고, 학장님도 동의하셨다. 그리고 연구기금 신청서와 상관없이 다른 기금을 끌어와서라도 내게 새 컴퓨터를 사주시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큰 성취감을 맛보았다.
이건 새 컴퓨터를 받게 되어서 신나는 수준이 아니다. 바쁜 와중에, 주어진 일을 하는 선을 초월해서 추가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 기초 자료를 모으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도 납득시키고,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려서 무언가를 이루어내었는데, 그 결과가 내가 애초에 목표했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 정말 기쁘고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새로 받게 될 쿨~ 한 컴퓨터: 이것저것 사양을 높여서 거의 삼백 만원짜리이다.
컴퓨터는 어차피 받기로 했지만, 이왕에 쓰기 시작한 연구기금 신청서를 마감일 연장 허락도 받았으니 마저 마무리해서 제출했다. 이 신청서가 채택이 될까 안될까 조바심낼 필요가 없으니 나머지 절반 분량을 채우는 것은 두 시간 만에 후다닥 해치울 수 있었다. 아침도 점심도 안먹고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든든했다. 신청서를 끝까지 마무리해서 제출한 이유는, 이것으로 내 교수 업적 보고서에 한 아이템을 추가할 수 있고, 학장님이 자세하게 다시 읽어볼 수도 있고, 그래서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한 번 더 다져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에 와서 학장님의 재확인 이메일을 받았다.
Thank you, Boyoung. I am also talking with Kenna to see if she has any extra equipment funds. I know we can find $2700 someplace. I am so glad you let us know you needed this. The magazine is impressive…and so beautiful! We will find a way to celebrate your monthly contributions to it. Thank you for leaving a copy with me.
Pat
성취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는, 외부로부터의 보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진정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일을 해냈을 때라고 한다. 어제의 일은 내적 보상과 외적 보상이 한번에 찾아온, 정말 운좋고 기분좋은 경험이었다.
잡지 다음세대 10월호의 표지 – 편집부 기자가 코난군 사진을 보고 잘생겼다며 표지모델로 쓰고 싶다고 했었다 🙂
목차의 가장 첫머리에 나온 내 칼럼 제목과 이름
편집부에서 이렇게 근사한 페이지를 만들어 주었다.
나의 프로필
2013년 10월 9일
연구기금에 관련해서 설명을 덧붙인다.
정말 마음같아서는 컴퓨터가 아닌 현찰로 삼백 만원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챙기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삼백 만원이면… 얼마나 굵직한 목돈인가!!)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 활동을 할 것인지를 계획해서 써야 하고, 그 활동을 뒷받침하는데에 반드시 필요한 금전이나 장비를 정확한 액수로 신청해서 받고, 또 원래의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도 증빙해야만 한다. 공적인 자금을 개인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이유이다.
그래서 사실은 연구기금을 신청하는 것이 더더욱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이다. 아닌 말로 연구기금을 신청해서 받아봤자, 내 주머니에 사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한푼도 없고, 돈을 받은 만큼 연구활동을 해야하니 더욱 바빠지기만 하고, 돈을 제대로 썼다고 보고서를 내야 하는 등 귀찮은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테뉴어까지 받은 이 마당에 그깟 연구활동 좀 덜한다고 해서 직장에서 받을 불이익이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테뉴어를 받은 중견 교수로서 신참 교수에게 모범을 보이고, 학생들에게 자랑스런 교수가 되고, 또 나아가 학계와 인류의 발전에 보탬이 된다는 대승적 관점의 생각으로 이번 일을 시작했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