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3편: 미국 유학을 처음으로 꿈꾸게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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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힘든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난생 처음 취직이란 걸 하고 봉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첫 직장은 그런 상식적인 힘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앞서 쓴 것 처럼, 경험이 없어서 힘든 것 뿐만 아니라, 상사가 보기 드물게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월급이나 사회적 대우가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기업에 취직한 친구들에 비해 너무 부족했고,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의 선생님이라는 인식보다는 지불하는 등록금만큼의 써비스를 드려야 하는 종업원 취급을 당하는 구조였고, 동네 구멍가게 수준의 직장 규모 때문에 컴컴한 지하실의 보일러를 켜고 끄는 일부터, 주차장과 진입로에 쌓인 눈이나 낙엽을 쓰는 일과, 원생들이 먹을 간식을 만드는 일, 까다로운 원장님 입맛에 맞게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일까지 다 해야만 했다.

그 날도 아이들이 하원하고나서 원장님과 교사들과 서무 미영씨가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원장님의 잔소리를 한바탕 듣고, 마침내 원장님은 전문대 강의를 하러 떠나고, 미영씨는 야간 대학 수업을 받기위해 서둘러 퇴근하고, 나와 동기 두명, 즉 교사 일동은 다음날 수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그림 동화를 찾아보기 위해서 정리라고는 되어있지 않은 엉망진창인 창고로 들어갔다. 만약에 내가 찾는 그림 동화 자료가 없으면 그 때부터 내 손으로 그림 동화 열 몇 장을 그려야 할 판이었다. 다른 규모가 크고 자리잡힌 유치원에 취직한 친구들은 주제별로 잘 정리된 그림 동화및 교구 자료가 다 갖추어져 있어서 꺼내다 쓰고 제자리에 갖다넣기만 하면 된다는데, 우리 유치원은 날마다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자료를 찾다가 결국은 못찾고 직접 만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창고의 먼지쌓인 선반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꺼내든 것이 미국 어느 대학교에서 만든 해지난 달력이었다. 여느 대학교 달력이 그러하듯, 학교 시설과 주변 풍경을 멋지게 사진으로 담아 달력으로 제작한 것인데, 아마도 원장님이 “이런 건 함부로 버리지 말고 사진만 오려서 아이들 교육 자료로 활용해!” 하고 지시하셨던가보다. 그러나 해마다 바뀌는 교사들 때문에 그 달력은 (아마도 원장님이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 보내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먼지구덩이 속에서 몇 년을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몇 월의 풍경인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 아래에 대학교 건물인 듯한 빌딩이 있고, 그 앞에서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힘차게 걸어가는 백인 대학생의 모습이 찍혀있었는데, 그 낯선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기 보다는, ‘지금 내가 이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 나는 직장에 출근하는 길에 좌석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다녔는데, 버스에 탈 때마다 오늘 아침에 이 버스가 교통사고가 나서 출근을 안했으면 좋겠다 하는 상상을 늘 했었는데, 그 날은 달력을 보면서 비슷한 맥락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직장이 얼마나 다니기 싫었으면…

그렇게 다니기 싫은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일 년을 채우며 다녔던 것은 오직 우리반 아이들 때문이었다. 내가 갑자기 없어지면 우리반 아이들은 누가 가르치나 하는 걱정에서 그랬던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결국 유아교육 교사의 업무환경에서 시정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교사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혹은 개인적인 선택으로 학년 중간에 사직을 하게 되면, 즉시 대체교사가 그 자리를 메꿀 수 있어야 하는데, 사회적인 제도로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교사도 사람인데, 아프기도 하고, 멀리 이사를 갈 사정이 생기기도 하고, 임신이나 출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정에 없던 이직이나 휴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교사생활 첫 달인 3월에 목을 너무 많이 써서 후두염에 걸렸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후두염이었다), 유치원 길 건너편 병원에 간 것은 4월 말이었다. 병가라든지 월차라든지 하는 것이 전혀 없는 직종에 종사하는데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다시 달력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당시 내게는 유학은 커녕 해외여행조차도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내가 그 달력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병풍에 그린 닭이 꼬끼오 하고 우는 것과 같은 확율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는 정말로 미국에 유학을 와서 그 달력 그림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더이상은 창고의 먼지를 뒤집어쓰지도 않고, 내복을 두 개 입지 않았다고 원장님에게 팔뚝을 맞지도 않으며, 내가 탄 차가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미국 유학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영어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면서 내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해 답답하고, 멀리 계신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 우는 날도 있고, 어떤 때에는 돈이 없어서, 어떤 때에는 밥이 (한국 음식이) 없어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달력을 들여다보던 그 때를 생각하면 그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간혹 못된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짜장면 한 그릇을 혼자 다 먹는다며 나를 비웃던 원장님, 며칠 밤을 잠못자고 준비해서 치루어낸 행사를 마친 후 사소한 실수를 끄집어내어 악다구니와 함께 야단치던 김혜자 원장님에 비하면, 그들은 모두 천사요, 그깟 일은 웃어넘기면 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김혜자 원장님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근무했던 유희선, 이정민 선생과 몇 년 후에 만나서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도 나와 비슷하게, 인생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푸른기와집 부설 유치원에서 김혜자 원장님과 함께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 어떤 고생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더라고 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지…

2015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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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공원

이번에 회고록을 쓰면서 새삼 힘들었던 교사 시절을 회상하게 되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쉽고 행복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저께이던가? 교생 여덞명이 나가는 세군데 초등학교를 아침도 점심도 못먹고 운전해가며 한 바퀴를 다 돌고 오후에 연구실로 출근했는데,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여러 번 빙빙 돌다가 먼 곳에 주차를 하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연구실까지 걸어오면서, 평소같았으면 주차장이 부족한 대학교 행정을 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모습이 바로 저 달력 속의 그림과 흡사하겠구나, 그러니까 내가 꿈을 이루어냈구나, 하고 생각하니 불평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고마우신 김혜자 선생님…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