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에 남은 밥이 며칠동안 정체되어 있을 때, 혹은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심하게 만들기 쉬운 식혜는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료이다.
특히 우리 아이들은 식혜의 밥알을 무척 좋아해서 밥 대신 식혜 건더기만 한 그릇을 퍼먹기도 한다.
나는 어릴 때를 돌이켜보면 달콤한 물이 맛있는데 반해 그릇 바닥에 가라앉은 밥알은 떠먹기가 귀찮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밥알이 위에 동동 뜨는 서울식 식혜를 좋아했었다. 숟가락이 없이도 깨끗하게 마실 수 있으니까 말이다.
헌데, 내가 직접 만들어 먹어보니, 발효 중간에 밥알을 꺼내서 헹궈서 만드는 서울식 식혜는 공정이 한 과정 더 들어가서 번거롭기도 하고, 아무래도 깊은 식혜의 맛이 덜 나는 것 같다.
게다가 아이들이 식혜 밥알을 좋아하니 서울식 식혜 보다는 식혜 그릇 바닥에 밥알이 수북히 쌓이는, 내가 어릴 때부터 먹던 방식의 그 토속적인 식혜가 여러 모로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드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방법은 너무 쉬워서, 그리고 자주 해먹으니 따로 재료의 분량을 계량할 필요를 못느끼고 살다가, 인터넷으로 알게 된 이슬님의 부탁으로 조리법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재료: 쌀밥, 엿기름 가루, 설탕, 물, 전기보온밥솥 🙂
만드는 법 (우리집에 있는 솥의 용량과 아이들이 밥알을 좋아하는 취향에 맞추어 만드는 데에 필요한 분량이다)
1. 전기밥솥에 쌀밥을 앉힌다.
밥알을 좋아하는 아이들 때문에 쌀을 넉넉하게 4컵을 넣는다.
(어제는 저녁밥으로 먹을 분량까지 더해서 5컵의 쌀을 넣고 밥을 지었다.)
2. 현미나 잡곡은 넣지 않고, 고슬고슬한 밥이 되도록 물의 양을 조절한다.
물이 너무 많아서 질게 된 밥은 식혜 만들기에 좋지 않다.
먹다 남은 식은 밥이 있으면 굳이 새 밥을 짓지 않아도 된다.
3. 한인마트에서 파는 엿기름 가루를 준비한다.
예전에 티백으로 만들어 파는 엿기름도 써본 적이 있는데, 간편하기는 하나 아무래도 엿기름이 적게 들어가서 식혜의 맛이 조금 아쉬웠다.
내 경험상 엿기름 가루를 듬뿍 사용해야 밥알이 잘 삭아서 식혜의 깊은 맛이 나오는 것 같다.
4. 큰 대야에 엿기름 가루는 1파운드 (450그램) 를 넣는다.
5. 물은 4리터를 부었다.
가루가 물에 잘 풀리도록 저어서 앙금이 가라앉도록 가만히 둔다.
6. 그러는 동안에 고두밥이 지어졌다.
7. 다 된 밥을 한 번 뒤적여주고 (그러니까 네 컵 분량의 쌀밥이다) 다시 조금 더 기다린다.
금방 지은 밥은 너무 뜨거워서 엿기름 발효가 잘 안되므로, 뜨거운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실 때 까지 기다린다. 온도를 측정해보지는 않았으나, 보통의 보온밥솥 안의 밥 온도 정도면 된다. 아니면 아예 식은밥도 괜찮다.
8. 식혜는 저녁에 만들기 시작하면 시간 활용하기가 좋다.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밥을 짓고 앙금을 가라앉히기 시작하면, 그 이후에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마지막으로 자러 올라가기 전에 다음의 공정을 마친다 🙂
9. 네 시간 정도 가라앉힌 엿기름 물인데, 아랫쪽에 엿기름 반죽 덩어리가 잘 가라앉아 있고 위에는 맑은 윗물이 떠있는 상태이다.
10. 윗물만 조심해서 밥솥에 따라 넣는다.
앙금이 들어가면 식혜의 색이 시커매지고 맛도 떨어진다고 하니 조심조심 윗물만 따라 붓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집 10컵 짜리 쿠쿠 밥솥에는 4리터 분량으로 얻어낸 윗물의 분량이 딱 맞다.
외우기 쉽게 쌀 4컵, 엿기름물 4리터 (그 중에 앙금과 함께 빠지는 분량이 있다).
11. 윗물을 따라내고 남은 앙금이다.
여기에서 벌써부터 식혜의 향이 물씬 풍겨난다. 하지만 이걸 어디 다른 곳에 사용할 방도가 없어서 그냥 물을 많이 부어 하수도에 버린다. 뭔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날 아침이다.
12. 전기밥솥의 보온 상태로 8-12시간 정도 발효하면 이런 형상이 된다.
경험상 최소한 6시간은 발효해야 하고, 14시간 이상 넘어가면 너무 발효가 되어서 시큼한 맛이 나기까지 한다.
13. 큰 냄비에 옮겨서 설탕 2컵을 넣고 끓인다.
식혜의 건더기보다 물을 더 좋아한다면 2리터 정도 물을 더 부어서 끓인다.
설탕의 양은 전적으로 먹을 사람의 취향에 따라 조정한다.
우리집 식구들은 달콤한 맛을 좋아해서 넉넉하게 두 컵을 넣는다.
14. 여름이라 더욱 차가운 식혜를 마시기 위해서 밥알을 따로 얼려두기로 했다.
피처에 식혜를 담아두면 밥알이 아래에 가라앉아서 따르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밥알을 따로 얼려두고 피쳐에는 물만 담아두면, 컵에 따르고 밥알 얼음을 띄워 내면 편리하다.
식혜를 끓일 때 주의할 점:
이미 보온 상태로 오랜 시간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끓어오른다.
자칫 방심하다가 식혜가 끓어 넘쳐서 부엌 청소를 해야 하는 재앙을 맞이하지 않도록, 뚜껑을 연 채로 끓이고, 반드시 옆에서 지키고 서있어야 한다.
끈적한 식혜국물이 넘쳐흐른 전기스토브 청소를 수 차례 해본 뼈아픈 경험해서 우러나온 팁이다 ㅎㅎㅎ
끓이는 시간은 5분 정도면 충분하다.
익히기 위해서 끓이는 것이 아니고, 엿기름 발효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열을 가하는 것이다.
2016년 6월 16일
앗 이렇게 빨리 자세히 써 주시다니ㅠ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전기밥솥을 안 써요..크락팟으로 발효를 해도 될까요??
슬로우 쿠커로도 식혜를 만들 수 있다고 들었어요.
보온 상태의 온도를 계속 유지하기만 하면 되니까 전기보온밥솥이든 크락팟이든, 아니면 아랫목에 이불 덮어 두는 옛날 방식이든 다 될 것 같아요.
다만 용량이나 발효 시간 같은 것은 조금씩 차이가 있겠죠?
맛있는 식혜 잘 만드시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