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이 상했다고 짜증내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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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그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연탄재 라는 시를 패러디 해보았다 🙂

 

짜장이 상했다고 짜증내지 마라

내 속이 더 상했다

 

 

이번 주 내내 크고 작은 힘든 일이 겹쳐 일어나고 있는데, 돌이켜보면 지난 일요일 저녁에 짜장 소스를 만들 때부터 슬슬 그 서곡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일요일 저녁식사 준비로 오뚜기 짜장 가루를 사용해서 짜장을 한 솥 끓였다. 

쌀밥 위에 얹어서 비벼먹거나 우동면을 데쳐서 짜장면을 만들어 먹으려던 의도였다.

냉동실에 있던 돼지고기 덩어리를 꺼내보니 조금 모자란듯 해서 냉동실 구석을 더 뒤지니 약간 수상쩍은 상태의 고기가 한 덩어리 더 발굴되었다.

그 수상한 상태를 최대한 숨겨보려고 야채도 듬뿍 넣고 마늘과 생강과 후추를 넉넉하게 뿌려보았지만, (그래서 짜장의 양도 완전 늘어나는 아픔이…) 다 만든 후에 한 종지 떠서 맛을 보니 이건 사람이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무언가 새로운 요리를 다시 생각해내서 만들 시간도 없고 잡친 기분을 수습하기 위한 물타기 식으로 돼지고기 대신에 베이컨을 넣고 소량의 짜장소스를 다시 만들었다.

그럭저럭 일요일 저녁밥을 해먹고 다음날 월요일이 되어 온가족이 등교하고 출근을 했다.

 

월요일 아침에 주말 동안에 밀려있던 업무를 해치우고 오후에 세미나를 마치자마자 둘리양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첫 발레 클래스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생 한 명이 그 날이 제출 마감인 서류 하나를 가지고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도움을 청했다.

서류 제출 마감도 오후 5시, 둘리양 발레 클래스도 오후 5시…

번갯불에 콩을 굽는 자세로 학생도 도와주고 둘리양 옷을 갈아압히고 머리도 묶어서 아랫층 발레 클래스로 데리고 갔다.

IMG_2891.jpg

이번에도 둘리양을 예뻐하는 무용과의 이선생님이 친히 둘리양을 맞아주었다.

우리 학교에 새로이 총장으로 부임해온 햄필 박사님의 늦둥이 막내딸도 같은 클래스에 등록을 했던가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박박 민 머리에 트레이드 마크같은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햄필 총장님이 유리창밖에서 앙증맞은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딜가나 남의 눈에 잘 띄는 총장님도 총장님이지만…

우리 학교에서 드문 동양인 여교수인 나도 은근이 튀는 편이다…

그리고 총장님과는 예전에 큰 규모의 미팅에서 두세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마다 나를 알아보고 "당신은 사범대에서 일하는 그 교수맞지?" 하고 말을 걸곤 했었다.

그런데…

둘리양이 발레 교실 안에서 울며불며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발레 선생님이 어떻게든 꼬셔보려고 진땀을 흘리고, 지켜보다 못한 이교수 까지도 둘리양을 달래려고 쌩쑈를 하는 모습을 복도에서 지켜보고 계시던 총장님… 즉 나의 보스…

유아교육과 교수가 자기 아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모습을 실시간 생방송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둘리양은 엄마품에 안겨서 다른 아이들의 수업을 지켜보았다.

차라리 여기서 나가자고 권해보았지만, 이 녀석은 발레 수업은 간절하게 듣고 싶고, 다만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었던지라, 꼬물거리며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 틈에서 내가 둘리양의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자는 것이 요구사항이었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요구인지를 알려주는데 실패하고 그냥 큰 소리 안내고 나지막히 징징거리는 게 다행이다 하면서 둘리양을 안고 교실 안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내 연구실로 돌아왔다.

준비해온 김밥을 먹으며 둘리양은 조금 놀게 하고 나는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는데 학과장이 내 연간업적보고서를 평가한 성적표가 와있었다.

해마다 별 무리없이 최상의 성적을 받던 터라 아무런 생각없이 메일에 첨부된 문서를 열었더니…

짜잔~~~

임용된 첫 해에 받았던 평가 이후로 최악의 점수가 나와있었다.

최근 5년간 모든 부문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오던 내가, 이번 해에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보다 한등급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었다.

이웃 연구실에 아직도 남아있는 교수 두어명에게 슬쩍 물어보니 대략적인 추세가 새로온 학과장이 업적 심사를 아주 깐깐하게 해서 모두들 작년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그나마 나혼자 못받은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올해에 정교수 심사를 받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전과 비교해서 확연하게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뻔하니, 이 점수를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급하게 비서를 통해서 학과장과 면담을 신청해놓고,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며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부엌 정리를 하다말고 나를 맞아주었다.

그 날도 낮 시간 동안에 날씨가 많이 더워서 냉장고에 넣지 않고 두었던 짜장소스가 상해버렸다고한다.

그러니까…

원래 만들었던 짜장 한 솥 + 다시 만든 짜장 남은 것 한 대접 정도 = 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남편은 무심하게 "날씨가 더울 때는 음식 관리를 좀 더 잘했어야지" 하고 한 소리를 하는데…

 

나는 그냥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오늘 하루 나 무척 힘들었거든. 지금 나한테 뭐라 하지 마."

 

 

 

글도 생각보다 길어지고…

마침 학과장과 면담 시간도 다 되었으므로 오늘 글은 여기까지만 쓴다 🙂

 

다음 편 예고:

위의 상황 이후에도 수많은 사건과 이야깃거리가 이어졌다.

오늘 면담 결과에 따라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고 비극이 될 수도 있으니,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리며, 내일 이어질 다음 편을 기대하시라!

 

 

2016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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