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지금껏 수백 권이 넘는 책을 사고 천 권도 넘게 읽었겠지만 책을 직접 만들어 보는 기회는 없었다.
아들을 잘 둔 덕분에 마침내 집에서 책을 만드는 일도 해보게 되었다.
문서 편집기에서 특수한 기능을 사용해 레터지 (한국의 에이포 용지와 비슷한 크기, 미국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용지 크기이다) 의 양면에 적절한 페이지가 인쇄되도록 지정해서 프린트를 한다.
다음은 6-8장 정도의 종이를 절반으로 접어 왁스를 먹인 실로 꿰메어 준다.
대략 140여 페이지가 넘는 소설이니 6-8장씩 바느질한 묶음이 예닐곱 개가 되는데 이걸 또 함께 엮어준다.
이제 책의 속 페이지는 하나로 엮였고, 다음은 표지를 만들 차례이다.
속표지를 특수한 풀로 잘 붙이고 책의 척추 부분에는 거즈를 사용해서 한 번 더 단단하게 접착한다.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인 코난아범이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접고 잘 묶고 잘 붙였다.
가장 겉표지는 코난군과 조나스가 직접 고른 종이를 사서 잘라서 만들었다.
표지 사진도 직접 찍고 포토샵으로 손질한 다음 사진을 인쇄하는 특수 용지에 인쇄해서 준비했다.
저 사진 하나를 찍는데에도, 평일 오후 시간을 기다려 – 평소 평일 오후에는 코난군이 학교에 있어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절 방학이 되기를 기다렸다 –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우산을쓰고, 아이패드로 문자 메세지를 보내서 아이폰으로 받게끔 연출해서, 그렇게 정교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조나스 엄마가 각종 용지를 다양한 모양으로 자를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있어서 스티커 용지에 책 제목을 출력해서 오려서 가져다 주었다.
스티커로 출력한 제목을 표지에 놓은 다음 다림질을 하면 완벽하게 달라 붙는다.
이렇게 정성 가득한 홈메이드 제본 책은 출판기념회 파티에 참석한 아이들에게 한 권씩 선물로 주었다.
아마도 한국에 의뢰해서 다량으로 인쇄한 책을 코난군의 고모와 삼촌이 우리집에 오는 길에 배달해 주게 될 것이다.
원하는 친구들에게 한 권씩 팔거나, 격려해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로 증정할 계획이다.
이렇게 홈메이드 제본을 하기 전에 연습삼아 만든 책을 코난군이 학교에 가지고 간 적이 있는데 (지난 번 글에서 썼다), 교장의 대응이 마음에 안들어서 한 번 더 골려주기로 했다 🙂
연습용 책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그러나 속지는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것을 만들었다.
주말 동안에 잔디 깎으랴, 파티 하랴, 지붕의 태양전지판 밑의 너구리 퇴치 방법 연구하랴, 무척 피곤하고 바쁜 코난아범은, 그래도 이런 장난을 준비할 기운이 남아있었다 🙂
코난군도 아빠와 쿵짝이 맞아서 함께 준비한 장난이다.
부활절 방학이 시작하기 직전에 가지고 갔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책자를 부활절 방학이 끝난 오늘 학교에 가지고 갔다.
이 책자를 교실 책상이나 가방에 잘 보이도록 그냥 두기만 하는 것이다.
교사나 교장이 화들짝 놀라 이 책자를 열어본다면,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속지를 보며 놀라고, 그 안에 코난군이 연습장 삼아 적어놓은 리차드 파인만의 문구를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작은 반항이자 복수이다.
2019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