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9-1-1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응급콜센터와 소방관, 경찰 등이 엮어내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배경은 한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즉 엘에이 시 이다.
지금 현재 네번째 시즌이 폭스 채널에서 방송되고 있고, 훌루 라고 하는 넷플릭스 비슷한 사이트에서 지난 시즌까지 포함해서 드라마 전편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넷플릭스만 돈을 내고 보았는데, 훌루에서 특가 세일을 해서, 올 한 해 동안만 훌루에 올라오는 드라마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드라마 한 편당 광고가 다섯 번 씩이나 나온다.
아이들이 인터넷에서 이 드라마에 대해 주워듣고 자기들끼리 한 두 편 보기 시작했다가, 너무 너무 재미있으니 엄마도 꼭 봐야한다고 성화를 해서 나도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 한 편 한 편이 극장판 재난영화 같아서 흥미진진하다. 다만, 응급상황을 주제로 삼은 드라마인 만큼, 사람이 다치는 장면이 자주 나오고 (응급구조대의 활약 덕분에 죽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 등급이 14세 이상 관람가 이다. 원칙대로 하자면 우리 아이들은 아직 이 드라마를 볼 수 없는 나이이지만, 보호자인 내가 함께 시청하면서 적절한 가이드를 하고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한, 끔찍한 장면은 번개처럼 휙 지나가게 편집하거나 카메라 앵글을 교묘하게 잡아서 직접 보여주지 않으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강점은 등장인물이 제각각 개성이 뚜렷하고 각자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있다는 점이다. 매번 발생하는 응급상황과 각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다.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 하나는, 그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그 어떤 편견도 끼워넣지 않고, 그들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남여 커플이 사는 것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성애 동성애 상관없이 배우자가 한눈을 팔면 속상하고, 자녀를 키우는 일은 똑같이 힘들다. 왜소한 동양인 소방관이 근육질의 백인을 제치고 올해의 달력 모델로 선발되고,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는 어린이는 쓰나미가 덮쳐도 용감하게 살아남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편견없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뽑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 매력있는 등장인물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가장 먼저, 엘에이 소방국 118 지구대의 대장인 바비와 엘에이 경찰관 아테나 커플
이 둘은 동료로 만났다가 결혼을 한 커플이다.
바비는 원래 미네소타주에서 소방관으로 일했는데,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음주에 의지하다가 실수로 불을 내서 자신의 가족이 사망하는 사고를 겪은 전력이 있다. 가족이 살던 아파트 전체로 불이 번져서 수 십명의 사망자가 생기는데, 그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다가 엘에이 소방서로 이직한 다음, 자기가 죽게 만든 사람의 숫자만큼만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그 다음에는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엘에이 소방서에서 만난 좋은 동료들과, 새로운 부인 아테나를 만나서 자살 결심은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경찰관인데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만 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나 범죄 현장으로도 출동하기 때문에 소방관과 경찰관이 협력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바비와 결혼 하기 전에는 건축일을 하는 마이클과 사이에서 남매를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으나, 마이클이 뒤늦게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는 바람에 마이클과 결별하고 바비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클은 아이들의 아버지 자리까지 버린 것은 아니어서, 자주 아테나의 집으로 와서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테나는 남편도 있고 아이들의 아빠와도 잘 지내고 있는데, 얼핏 보면 특이하지만, 가족 모두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매우 바람직한 가정이다.
아테나가 남자 범죄자를 무시무시한 표정과 태도로 장악하는 장면을 보면 내 속이 다 시원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로서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에서는 누구보다도 마음 여린 모습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테나의 목소리와 흑인 억양이 살짝 섞인 말투가 참 좋다.
다음은 침니와 매디 커플
굴뚝 이라는 뜻의 침니 라고 불리우는 이 남자의 극중 본명은 하워드 한 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극중에서도 한국계 미국인으로 나온다. 배우의 실제 이름은 케네스 최 이다. 케네스 최는 나보다 한 살 많은 1971년생으로 시카고로 이민온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 시절 한인교포 부모가 그러하듯,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들 케네스는 대학을 중퇴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시카고를 떠나 서부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 때 부터 부모의 지원은 끊어지고 고생을 많이 하다가 마침내 배우가 되었다고 한다.
케네스 최가 맡은 배역 하워드 한의 인생도 그에 못지 않게 파란만장하다. 한국에서 재혼해서 얻은 막내 아들만 애지중지하고 하워드는 전혀 돌보지 않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는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친구인 한인교포 부부 가정에서 양자처럼 자랐는데, 그 집의 아들인 케빈과 나란히 소방관이 되었다. 하지만 케빈은 화재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다가 사고로 죽고, 하워드는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처음 118 소방대에 발령받아 왔을 때는 한동안 자신을 유령처럼 대하는 동료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소방대장 바비의 부재시에는 임시 대장을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다. 동료의 누이동생인 매디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의 별명이 왜 굴뚝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그를 굴뚝/침니라고 부르고 있다.
매디역을 맡은 사람은 제니퍼 러브 휴잇 이라는 제법 많이 알려진 배우이다. 전성기에 출연했던 영화가 무척 많은데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가 대표작이다. 동료 남자 배우와 결혼을 했는데, 그 남편이 9-1-1 드라마에서도 남편 역으로 나왔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는 무척 나쁜 남편이어서 부인을 폭행하고 스토킹하다가 심지어 죽이려고 한다. 매디는 그 죽음의 위기에서 온힘을 다해 탈출하다가 남편을 정당방위로 죽게 만든다. 실제 남편을 극중에서 죽이는 연기를 하는 기분이 어땠을지 무척 궁금하다.
사이코패스인 전남편을 죽이고난 후에 침니와 본격적으로 사귀고 있다. 침니의 동료 소방관 벅이 매디의 오빠라서 처음에 만나게 되었고, 지금도 9-1-1 콜센터에서 일하면서 오빠와 남자친구를 잘 돕고 있다. 전직이 응급실 간호사라는 설정이어서 응급구조 통화를 하면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자주 있다.
다음은 118 소방대의 귀염둥이 브라더, 벅과 에디
벅은 매디의 오빠인데 무척 철딱서니 없는 총각이라서 여동생인 매디가 오히려 오빠를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얼굴이 반반해서 응급구조를 하러 갔다가 여자들과 엮이는 일이 종종 생긴다. 사고로 부상을 당해서 소방관 일을 할 수 없을 위기에 처하자, 엘에이 시 당국과 118 소방대를 상대로 법적소송을 걸어서 동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철부지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지진 현장, 쓰나미 현장, 화재, 교통사고 등등을 겪으면서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있다.
어느날 118 소방대에 불쑥 나타나서 벅에게 경쟁심을 불러 일으킨 에디는 싱글대디로 뇌성마비를 가진 아들 크리스를 키우고 있다. 부인이 장애를 가진 아들을 홀로 키우게 남겨놓고 돈을 벌기 위해 해외파병을 다녀오는 바람에 부인과 사이가 소원해져서 별거를 오랫동안 하다가 마침내 재회해서 아들 크리스까지 세 가족이 단란하게 살게 되나 싶더니만 부인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비운의 사나이이다. 동료 벅에게 아들을 봐달라고 맡기는 일이 자주 있는데, 그러다가 두 남자가 아이와 함께 있게 되면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이 게이 커플인줄 오해하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잘 생기고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어서 극중에서 구조현장에 출동했다가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 일이 자주 있다. 내가 봐도 둘다 흐뭇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다음은 헨리에타, 줄여서 헨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 많은 현장에서 동료를 부르려면 짧은 이름이 편리해서 그런지, 헨리에타는 헨 이라고 부르고 위의 벅은 원래 이름은 에반 벅클리인데 줄여서 벅 이라고 부른다.
헨은 레즈비언이어서 여자이지만 부인을 두고 있다. 전처가 낳은 아들을 현재 부인과 함께 키우고 있는데, 마약쟁이인 전처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헨과 결혼해서 함께 키우다가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고 헨과는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집의 족보가 가장 많이 꼬이고 복잡한데… 헨과 그의 아내 캐런은 동성부부이고, 그들이 키우는 아들 데니는 두 엄마 중 그 누구하고도 혈연관계는 없다. 하지만 이집 사는 모습은 혈연으로 맺어진 이성애 커플의 가족과 많이 다르지 않다. 지지고 볶으며 사랑하고 다투거나 다독이며 그렇게 잘 산다. 최근에는 여자 아기를 한 명 입양해서, 유전자가 전혀 다른 네 명이 가족이 되어 살게 되었다.
헨은 외모에서 벌써 강력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데, 구조 현장에서도 남자 대원들에게 전혀 뒤쳐지지 않는 능력을 발휘한다. 낙심하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구조자를 안심시킬 때 보여주는 푸근한 미소는 내 마음까지도 편안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아테나의 전남편 마이클
118 소방대나 응급콜센터, 경찰서 등과 전혀 무관해서 어찌보면 이 드라마에서 비중이 덜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테나의 전남편이자 아이들이 아빠로서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나 자상해서 빠뜨리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용기를 내어 가족들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고,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데다, 아테나와 새로운 짝 바비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직업은 아마도 건축가인 듯 한데 돈도 잘 버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완벽한 캐릭터이다. 다만, 시즌3 막바지에서 뇌종양을 진단받아서 온가족이 슬퍼하고 있다. 다음 시즌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아직 모르겠다.
2021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