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양이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간 이후부터 나는 가능하면 학교 내의 여러 가지 자원봉사에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새로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학교 인사 모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PTA (Parent Teacher Association, 사친회)의 회장인 학부모가 나하고 유아교육 일로 어느 정도 엮여 있는 사이이고, 또 킵스팜 단지내의 아줌마들이 임원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시간을 낼 수 없을 때는 빠지고, 내 시간이 허락하고 내 마음이 내키는 정도로만 봉사를 하고 있어서 부담이 되는 일은 없다. 지난 학기를 돌아보니, 도서전에서 판매원으로 도왔고, 선생님 감사 주간에 초코렛을 기부했고, 아이들 할로윈 행사에도 초코렛을 기부했었다. 기금 마련을 위한 핏자 판매 행사에서 핏자를 분류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어차피 내가 주문한 핏자를 가지러 가야 하니, 학교에 간 김에 한 시간 동안 주문서와 대조해서 핏자를 종류별로 분류하는 일을 돕고 그 덕분에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내 핏자를 가지고 귀가할 수 있어서 시간 운영에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Thankful Thursday’s Soup and Chili Luncheon 행사가 있었다. 선생님과 직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숩이나 칠리를 점심 식사로 대접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뜨끈한 국을 끓여서 솥째로 내어놓고 원하는대로 떠먹도록 준비하는 것인데,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 따끈한 국물 한 대접 후르륵 마시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고, 그 따뜻한 국물처럼 학부모의 감사하는 마음이 교직원에게 따뜻하게 느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라고 쓰면 너무 낭만적이고 ㅎㅎㅎ 만들기도 쉽고 각자 원하는 종류와 양만큼 떠먹기도 편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숩이나 칠리를 점심식사로 대접한다는 뜻이니, 사은탕중식 이라고 번역해 보았다 🙂
2-3주 전부터 온라인 상에서 누가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를 정했다. 숩과 칠리에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롤빵이나 후식도 메뉴에 있었다. 숩이나 칠리는 만들기가 아주 쉽지만, 이왕이면 한국 문화를 소개할 겸해서 한국식 숩을 만들기로 했다. 매운 쇠고기국은 그 색깔과 매운 정도가 칠리와 비슷해서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육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콩나물국도 끓이기로 했다. 사실 콩나물국은 재료비도 아주 저렴하고 만들기도 쉬워서 곁다리로 끼워넣기에 아주 좋은 메뉴인데 반해, 채식주의자의 입맛을 고려해서 특별히 따로 준비했다는 생색을 내기에도 무척 좋았다.
물론 쇠고기국이나 콩나물국도 제대로 정성을 다해서 끓이자면 육수를 내는 것부터 해서 일이 많겠지만, 나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려고 쇠고기 다시다와 멸치 다시다를 적절히 넣어서 간단하게 국물을 만들었다. 마늘은 미국 마트에서 파는 마늘가루를 넣어서 강한 향을 완화시켰고, 쇠고기국에는 고기, 두부, 파, 무, 숙주나물을 넣고 식감이 생소한 고사리는 넣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외국인들의 입맛에 너무 생소하지 않은 맛을 내려고 노력했다.
아침 11시까지 학교에 국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10시부터 11시까지 온라인 미팅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국을 미리 다 끓여놓고 미팅이 끝나자마자 들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었다. 오늘 미팅은 학과장과 시간강사 한 명과 함께 책의 한 챕터를 쓰는 일을 위한 회의인데, 이번 학기 내내 목요일 아침마다 만나서 함께 쓴 것을 리뷰하고 의논을 하고 있다. 11월 30일이 제출 마감일이어서 이제 이 일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은 내가 아이 학교에 자원봉사를 가야 하니 회의를 10시 45분까지 마치도록 하자고 미리 부탁을 해두었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준비해둔 국과 밥을 들고 학교로 가는데, 우리 동네 어떤 집 차고에서 내가 오는 줄 모르고 무작정 후진으로 차를 빼고 있어서 급정거를 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국이 튀어 흐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물이 밖으로 튈까봐 랩으로 한 번 덮고, 차 트렁크 안에 박스를 놓고 실었지만 급정거의 파괴력이 더 컸다.
학교에 도착해서 일단 흘릴 것이 없는 밥통을 먼저 들고 들어가니 마침 다른 학부모 한 명이 음식을 차리는 것을 돕고 있었다. 내 상황을 설명하니 흔쾌히 돕겠다며 주차장으로 나와서 두 솥의 국을 나와 함께 옮겼다. 페이퍼타올로 흐른 것을 닦고 대충 수습을 하니 아줌마 수다가 시작되었다. 이 엄마도 올해에 이 학교에 처음 전학을 온 3학년 딸아이를 두고 있고, 그 위에는 7학년 아들이 있다고 했다. 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레곤 등등 서부 주에서 살다가 동부로 이번에 처음 이사를 왔는데, 자기 제부가 한국인이라며 내가 만들어간 국에 관심을 보였다. 삼성에서 근무하는 제부 때문에 여동생이 서울에서 3년째 살고 있고, 그 커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식을 했을 때는 한국식당에서 피로연을 했는데 그 때 먹어본 한국 음식이 환상적이었다고도 했다.
크락팟 이라고 부르는 이 주방기구는 낮은 온도에서 서서히 음식을 익히는 슬로우쿠커이다. 크락팟은 슬로우쿠커를 만드는 회사 중에 하나가 지은 이름으로,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퐁퐁이 크락팟이고 (상품명) 주방세제가 슬로우쿠커에 해당한다 (제품명). 인스탄트팟을 구입한 이후 크락팟은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렇게 팟럭 파티에 음식을 따뜻한 상태로 내놓을 수 있어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는데 (새로 이사한 집의 주방 찬장이 넓기도 하고) 오늘 그 진가를 발휘했다.
오후에 빈 그릇을 가지러 가보니 다른 PTA 회원 엄마들도 와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빈 그릇을 가지고 나오니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고맙다며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낯선 음식이었을텐데 제법 많이 먹어주어서 절반이 안되게 남아있었다. 남은 국은 우리집 오늘 저녁밥이다 🙂
2021년 11월 18일
다음날 추가함: PTA 회장인 쌔라가 감사인사 메일을 모두에게 포워드 해주었는데, 그 중에 한 선생님은 2학년 담임인데, 특별히 한국식 두부가 들어간 국이 souper delicious 했다고 썼다. super 대신에 souper 라고 쓴 것이 재미있었고, 한국 음식에 대해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되어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