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추수감사절 방학을 맞이했고 추수감사절이 미국인의 큰 명절인 이유로 각종 레슨이나 방과후 활동도 모두 쉬게 되었다. 아직 1차 뿐이긴 하지만 코로나19 예방접종도 했으니 오랜만에 둘리양의 절친 주주를 집으로 불러서 놀게 했다. 둘리양은 전학을 한 이후에도 주주와는 페이스타임으로 연락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밖에서 만나서 놀게 하기도 했지만 집안에서 오랜 시간 함께 놀았던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주주가 가지고온 진저브레드 하우스 만들기 킷으로 조물조물 만들기를 하고, 둘리양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지하실에서 철봉이나 당구를 하면서 아침부터 오후까지 둘이서 재미있게 놀았다. 내가 만든 만두를 점심으로 차려주니 주주는 늘 그러하듯 무척 맛있게 먹었다. “우리 엄마는 몇 번을 만들어도 이 맛이 안나요!” 하고 말하기도 했다 ㅎㅎㅎ
모처럼 날씨가 조금 따뜻해져서 나는 우리집 포치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밖에서 전구를 설치하고 있자니 이웃집에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못보던 차가 집앞에 주차되고 거기서 내리는 가족단위의 손님들은 선물이나 음식이 담겼을 것 같은 큰 그릇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고, 집주인은 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이하고… 우리 나라의 추석이나 설날 명절의 풍경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우리같은 이민자들은 본국의 명절은 바쁘다보니 그냥 쉽게 지나쳐 보내지만, 미국의 명절에는 가족 친지가 가까이 살지 않아서 느끼는 고적함이 있다. 다른 집들은 모두 친척이 모여서 파티를 하는데 우리집은 명절 분위기도 별로 안나고 조용한 것이 어른들에게는 휴식이 되어서 좋지만,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회상해보니 더욱 그렇다. 명절에 북적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추억이 좋았는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추억을 만들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 끼리만이라도 명절에는 장식을 하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저녁에 우리끼리 먹을 명절 음식을 만들다가 생각해보니, 주주네 가족도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주네 외할머니는 프랑스 주주 이모네 집으로 이사를 가셨기 때문에 그 집도 달랑 세 식구가 심지어 두 집에 나뉘어 고적한 명절을 보낼 것이다. 간혹 직장 동료나 아주 친한 친구가 추수감사절 디너에 초대를 해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추수감사절은 가족과 함께 하는 명절이라 그렇다.
주주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주주를 데리러 오는 길에 아예 우리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주주 아빠가 추수감사절 요리를 해서 가족이 함께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나의 취지를 설명하니 (아이들에게 북적이는 명절 기분을 느끼게 해주자는) 주주 아빠만 동의하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주주 아빠에게 전화해서 설명을 하니, 그도 흔쾌히 동의했다. 오늘 저녁 만큼은 우리도 유사 가족이 되어서 북적이는 명절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친구와 더 오래 놀 수 있게 되어서 신이 났다.
먹을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니 요리를 하는 즐거움이 더 커졌다. 음식이 남을까 걱정할 필요없이 손 크게 무엇이든 왕창 많이 만들었다. 낮에 만두를 튀기느라 튀김기를 사용한 김에 다른 튀김요리도 만들었다. 지글지글 기름 냄새가 명절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 요리를 대략 마친 다음에는 손님맞이 테이블을 차렸다.
손님 초대 음식 준비는 음식의 상태 보존이 중요하다. 손님이 왔을 때는 요리를 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음식이 차게 식거나 표면이 마르거나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오븐의 보온 기능, 전자렌지, 에어프라이어 등의 도구를 총동원하고 조리의 최종 단계를 조정하는 등의 전략이 필요하다. 양념 치킨을 만들기 위해서 닭고기는 미리 튀겨놓았지만 양념에 버무리는 것은 손님이 도착했을 때 하면 된다. 그러려면 튀긴 닭고기는 오븐에 보온 기능으로 넣어두어서 따뜻함과 바삭함을 유지하고 (yuji 하고 ㅋㅋㅋ) 양념도 다 만들어서 가장 약한 불에 올려두어야 한다. 새우튀김이나 만두는 식으면서 조금 눅눅해 지지만, 먹기 전에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면 방금 튀긴 것처럼 다시 바삭해진다. 그린빈캐서롤이나 스터핑 같은 요리는 어차피 국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전자렌지에 간편하게 데우면 된다.
추수감사절 당일은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장을 봐두었는데, 마트에서 명절 음식 완제품을 팔길래 세 가지를 샀다. 원래는 칠면조 뱃속에 넣고 요리해서 먹는 스터핑 이라는 요리는 식빵에 볶은 채소와 육수가 들어가서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인데 코난군이 무척 좋아한다. 날재료를 사서 요리하자면 일이 많지만 다 만들어진 것이 한 팩에 7달러 밖에 안하니 얼른 구입했다. 칠면조 고기는 너무 양이 많고 고기가 퍽퍽해서 다 먹지 못하고 처치곤란이 되기 십상이다. 미국인들도 추수감사절 지나며 남은 칠면조 요리를 처치하느라 맨날 그것만 먹는다고 자조하거나 우스개소리를 할 정도이다. 그래서 칠면조 대신에 닭고기 요리, 양념통닭을 만들기로 했다. 닭고기는 다리와 허벅지살을 각각 한 팩씩 구입했는데 껍질과 뼈가 다 붙어있는 것이 손질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저렴한 가격이 좋았다. 닭다리는 살 안쪽에 큰 혈관이 있어서 칼집을 많이 낸 후에 튀겨야 먹다가 피가 흐르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우리 오늘만큼은 친척이 되자!” 하고 말하니, 주주 엄마가 “어차피 남들이 보면 우리가 다 친척인 줄 알아” 한다 ㅎㅎㅎ 동양인끼리는 서로 비슷해 보여서 그런 것이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했다. 둘리양과 주주는 내친김에 우리집에서 자고 다음날 헤어지기로 했다. 주주 엄마는 다음날 근무가 있기는 하지만 블랙프라이데이에 정신과 질환 환자가 병원에 찾아올 일이 별로 없을 듯 하고 그래서 업무에 부담이 적으니, 다음날 아무 일도 없는 나머지 세 명의 어른들과 함께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고 놀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새 집으로 이사하는 주주 엄마네 집에서 이렇게 다 같이 모이자고 약속했다.
늦은 밤에 손님들이 돌아가고 수많은 설거지는 기계에 넣어두니 피곤할 일이 없어서 좋았다. 또한, 옛집의 다이닝룸에 비하면 지금 집의 모닝룸은 오픈키친으로의 접근성이 좋아서 음식을 먹다가 다시 데우거나, 다먹은 접시를 얼른 치워버릴 수 있는 등, 여러 모로 파티를 하기에 편리했다.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러 가면서도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어서 손님과 대화가 끊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예전 집에서는 여러가지 가구로 가득한 다이닝룸이 비좁아서 주방에 뭔 가지러 가려면 손님이 의자를 당겨주어야 했고, 먼저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거실에서 노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으며, 뭐 사소한 것 하나를 가져오려면 나누던 대화를 중단하고 단절된 공간(부엌)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집은 참 편리하게 공간 구성이 되어있다.
2021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