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4

직업 윤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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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고 낙천적인 성격인 나는, 직업이나 사생활에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한다. 조금이라도 내 수고를 줄이고 그로 인해 내가 편안하면 행복해진다. 그렇다고 내가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나 규정, 또는 도덕적인 한도 내에서 게으름을 부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족을 위해 식사 준비를 할 때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서 육수를 내지 않고 간편한 쇠고기 멸치 다시다를 쓴다. 그런다고 경찰 출동 안하고, 쇠고랑 차지 않는다 ㅎㅎㅎ 도덕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만하면 충분히 좋은 음식이니, 나는 편하고 만족해서 행복하다.

직업의 세계에서도 내 행동양태는 비슷하다. 종신교수 (테뉴어, tenure) 및 정교수 승진을 모두 마친 덕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흥미로워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도 다달이 월급을 받는데에 별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만 해도 해마다 직무 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고 있다. 내 일에 대해 열정이 있고, 그 열정을 실무에 잘 적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유아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강의를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유아 문해 교육 과목의 중요한 토픽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요약해서 강의 자료를 만들고, 정해진 강의 시간에 열심히 강의를 하고, 적절한 과제나 시험으로 학생들이 제대로 배웠는지를 확인한다. 여기까지는 교수가 해야 하는 일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뭘 더 하지 않아도 법과 윤리적 측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내 호기심과 창의력이 발동해서 작년에도 올해에도 한국의 어린이집을 섭외해서 학생들이 한국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활동을 하게 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외국어 사용 학생들을 가르치는 법을 배웠지만, 거기에 더해서 실제로 외국인 어린이들과 온라인상으로 만나고 영어를 가르치는 경험을 하면 배운 이론이 더욱 탄탄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조금 더 효과적으로 잘 배울 수 있을까 궁리하고 노력하는 것은 직업윤리 (professional ethics) 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내가 가진 직업 윤리와 내 양심에 대해서 깊이 돌아볼 일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는 래드포드 아동발달 연합 이라는 비영리 기구의 이사로 수년 째 봉사하고 있는데, 수학과 동료 아기다가 의장으로 있는, 지역에 우수한 시설의 어린이집을 건립한 바로 그 모임이다. 이 어린이집은 우리 이사회가 운영을 직접 하지 않고 킨더케어 라고 하는 전국망을 가진 회사에 위탁운영을 한다. 이사회는 위탁 관리하는 회사를 지정하고 소통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해마다 골프 대회를 열어서 조성한 기금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의 어린이집 등록금을 지원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우리는 비영리 기구이기 때문에 봉사하는 이사들에게 보수를 지급할 수도 없고, 어린이집 운영에서 수익을 창출해서도 안된다. 순수한 봉사만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지역에서 드물게 우수한 어린이집으로 인증받은 기관이고 대학 캠퍼스에서 가까운 덕분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 어린이집으로 실습을 많이 나가고 있다. 이번 학기에도 3학년과 4학년 학생들이 교육 실습을 하고 있고 나는 그 지도 감독을 위해 격주로 어린이집을 방문하고 있다. 한 실습생이 일하고 있는 학급에는 만 4세 어린이가 스무명 있는데 그 중에 한 아이가 행동정서 장애가 너무 심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심리적 신체적 위협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 아니고, 매일, 하루 내내, 아이의 정서 폭발이 이어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그런 이상 행동을 따라하거나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그런 학급을 지도하는 것은 두 명의 교사만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교사 한 명은 이 아이를 전담마크해서 더 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그 동안에 나머지 교사, 즉 나의 교생은 열 아홉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육 활동을 해야 하는데 불안감을 느끼거나 모방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지난 6주 동안 세미나와 현장 지도에서 꾸준히 교생을 지도하고 격려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실습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하고 있다.

교생실습 지도교수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어린이집을 섭외해서 학생을 옮기는 일이다. 좋은 말로 다독여서 현재 실습지에서 계속 머무르게 했다가는 아직도 9주일이나 남은 실습 기간 동안에 행동정서 장애가 있는 아동이 일으키는 과도한 폭력적 행동으로 심한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이미 사소하게 맞고 차이거나 물림을 당하는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고, 자칫 주의를 소홀히 하면 병원 치료를 요하는 중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책임을 묻게 되니, 안전하게 다른 실습지로 옮기는 것이 타당한 선택이다. 그런데, 교생이 다른 곳으로 가고나면 남은 교사는? 어린이들은? 남은 교사는 새로운 파트너 교사와 일해야 할 것이고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님이 적응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불안을 느끼며 일과를 보내야 한다. 이미 작년 가을부터 이 학급의 교사가 계속해서 바뀌는 동안 정서행동 장애가 있는 아동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어야 하는데 교사가 자꾸 바뀌니 아이가 정서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악화되는 것이다.

이 아이 하나로 인해서 자꾸만 교사가 교체되고 다른 아이들도 부상이나 정서적 위해가 있으니, 래드포드 아동발달 연합 이사회의 멤버로서 우리 어린이집의 안전과 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이를 퇴학조치 하면 어떨까? 그건 이사회 멤버로서의 윤리에 근거해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이다. 이사회의 의장인 아기다 역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아이만 사라진다면 나머지 아이들은 불안해 하지 않고 내 교생과 다른 교사가 지도하는 교육 활동에 참여해서 즐겁게 배우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교생도 머릿속에 가득한 교육활동 아이디어를 직접 지도하면서 탄탄한 실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해피엔딩이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어린이집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이 아이의 문제 행동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에 내 손모가지를 걸어도 좋다. 아니, 그로 인해 이 아이의 행동과 정서 문제는 더욱더 심해져서 정말로 심각한 문제아로 자랄 것이라는 예측에 손모가지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도 걸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직업 윤리를 넘어서 내 양심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동의 정신 건강을 지원하는 지역 기관에 문의하기도 했고, 위탁운영을 하고 있는 회사 임원에게도 이 사태에 대해 함께 고민하자는 공식적인 문서를 보내놓기도 했다.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해주는 아기다도 있고, 자기 선에서 해결할 문제를 위탁회사에 알려서 문제를 키웠다며 방방 뛰는 어린이집 원감도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교생도 있고, 날마다 불안에 떠는 어린이들도 있다. 당장에 적절한 개입을 해도 아이의 행동 교정은 오랜 시간이 걸릴텐데, 그 개입을 시작하기 위한 과정이 참 지난하다. 그 동안에 교생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지 그대로 있으라고 해야할지 먼저 결정해야 하니 교생과 실습오피스 담당자와 모두 함께 만나서 내일 의논을 하기로 했다. 방방 뛰며 속상해 하고 있는 어린이집 원감은 목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고, 내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게 아니라 물 밖으로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함께 힘을 모아 이 아이와 다른 아이들을 바르고 안전하게 지도할 수 있는 방안을 의논할 계획이다.

길게 글을 쓰다보니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2023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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