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에 북유럽 어부들은 갓 잡은 청어를 죽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유통하기 위해 수조에 메기를 한 마리씩 넣어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메기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긴장하고 있는 덕분에 청어가 죽지 않고 오래 버틴다는 뜻인데,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라고 한다. 🙂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무척 그럴싸한 이야기이다. 너무 편하고 유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그 권태로움으로 인해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일이 없다는 것, 반대로 부족함이 있는 사람은 그 모자람을 채우고 싶은 욕구로 인해 부단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게 된다는 것은 제법 맞는 말인 것 같다. 내 자신을 돌아봐도,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극악무도한 원장 하에 신입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면서 통근에만 왕복 네 시간을 쓰고,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유치원 행사나 행사 준비 일로 출근을 하던 그 힘든 일 년 동안에 나는 해외 유학을 결심했었다. 이 힘든 삶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저녁에는 내가 지도하는 교육학 전공 학생들의 모임에서 행사가 있었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학점이 높은 학생들에게만 가입 기회가 주어지는 이 모임은 동료 교수 가스톤이 오래도록 지도해오고 있고 나는 몇 년 전부터 그를 도와 함께 일하고 있다. 학생들이 주중에는 각자 다른 강의 스케줄과 교생 실습이 있어서 주로 일요일 오후에 모임을 한다. 그런데 그날 모임에서 신입 회원 한 명이 아주 눈에 익숙했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나누고보니, 작년에 우리 학교 상담교육 석사과정에 입학한 그 학생은 코난군과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여자 아이(R)의 엄마(T)였다. 예전에 해마다 우리집에서 했던 트리하우스 파티에 참석해서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고부터는 R이 매들린과 절친이어서 코난군과도 자주 마주칠 일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사항: 최근에 코난군은 매들린과 헤어졌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서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쁘게 헤어진 것은 아닌 모양으로, 친구들 그룹에서 서로 문자도 주고받고 그렇게 지낸다.)
예전에 우리집 트리하우스 파티에서 만났을 때부터 T는 자그마한 체구 탓인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라 그랬는지, 어쩐지 마음 한켠이 짠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모임에서 다시 만나 그 동안 각자의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이 자랐다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반갑고 좋았다. T는 현재 버지니아 공대에서 실험실 직원으로 일하면서 주말에는 핏자 배달 일을 하고, 거기에 더해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번에는 우리 모임에도 가입을 한 것이다. 물론 코난군과 동갑인 딸 R을 키우는 것도 혼자만의 일이다. 일주일 중에 일요일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라서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며 연신 하품을 하는 T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 벌이로 모녀가 먹고 살기만 해도 빠듯할텐데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 대학원을 등록하다니… 그런 엄마를 닮았는지, R은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장래 진로를 진지하게 결심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건축가가 되고 싶은데 버지니아 공대는 별로 가고 싶지 않고 머나먼 타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드림 스쿨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 아이비 리그 소속 명문대에 못지 않은 입학하기 힘든 곳이다. 3년 후에 그 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 높이 세운 목표를 향해 지금부터 나아갈 마음을 먹은 것만 해도 아주 기특하다.
우리집 코난군은 아직까지 자신의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 어릴 때 쓰레기차 운전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생각해보고 있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결정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남편이 보기에 코난군은 미국인 아이들 보다는 수학을 잘 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수학이나 체계적인 논리력 등에 약한 편이어서 이과 성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코난군도 최근에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수학을 뛰어나게 잘하지 않은 반면, 감성적이고 스토리 텔링을 잘 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많이 닮은 것 같다. 미국 대학 입시에서는 문과 이과로 엄격하게 나누지 않기 때문에, 사실 코난군이 무슨 성향인지를 지금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대학교 전공이나 직업에 대한 생각을 시작해야 하는데, 코난군은 그저 친구들과 놀고 게임을 하는 것을 즐길 뿐, 진로에 대한 결정을 하지 않고/못하고 있다. 코난아범은, 코난군이 진득하게 공부를 하거나 야무지게 학교 과제를 알아서 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있어야 스스로 노력을 할텐데, 그렇지 못하니 아빠와 함께 하는 수학 공부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게임을 하면서 조금전에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장래희망이 없는 것도, 살면서 부족함이나 불편함이 없으니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 그럴 것 같다는 분석을 한다.
메기와 청어 이야기처럼, 과연 코난군은 너무 유복하게 자라서 헝그리 정신이 부족한 것일까? 그래서 아직 장래희망을 정하지 못하고, 학교 과제나 공부도 아빠가 늘 확인하고 재촉해야만 하나? 그런데, 만약에 그게 원인이라 하더라도 해결책은 없다.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 폭망해서 집도 차도 줄이거나 없애지 않은 다음에는, 용돈을 줄이거나 코난군이 사달라는 옷과 신발을 안사주는 등의 방법으로는 코난군에게 모자람에서 비롯된 헝그리 정신을 심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헝그리 정신은 커녕, 인색하고 악독한 부모에게 원망감을 가지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코난군의 헝그리 정신을 위해서 일부러 가난해질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족이 그리 대단하게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ㅎㅎㅎ 우리보다 몇 배는 잘 사는 가정의 매들린은 진즉부터 수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버지니아 공대 수의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코난군과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같은 집에서 같은 밥을 먹고 사는 둘리양은 학교 과제나 시험 공부를 부모가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야무지게 혼자 알아서 잘 하고 있다. 그러니 코난군의 야무지지못함은 환경 탓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메기와 청어 이야기도 엉터리라고 하지 않는가. 바다물고기인 청어를 민물고기인 메기와 같은 수조에 넣으면 어차피 둘 중에 한 어류는 살지 못한다.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자기가 납득하는 선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자녀의 문제 행동을 두고 서로의 배우자를 가리키며 ‘지 애비/에미를 닮아서 쟤가 저모양’ 이라고 부부 싸움 또는 사돈간의 싸움을 하는 것을 인터넷 게시판에서 흔하게 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부지불식간에 ‘저런 행동은 왜 아빠를 닮아가지고 저럴까?’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할 때도 있다. 아마 남편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최소한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일시적으로 할 뿐, 그로 인한 부부싸움은 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아빠와 엄마의 여러 가지 성격이나 행동을 골고루 닮았지만, 그게 내 유전자이냐 너의 유전자 때문이냐를 굳이 밝혀내기에는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닐 뿐더러, 정밀한 유전자 검사를 통해 밝혀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전자 가위로 각자 원하는 부분만 잘라 편집하는 기술이 첨단 과학 분야에서는 성과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코난군의 허술함이 누구를 닮은 것이냐를 따져봤자 이미 타고난 유전자를 어찌할 방도는 없다. 비록 코난군이 주의를 게을리해서 시험에서 실수를 하고 과제를 빠뜨리는 일이 있지만, 그의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도, 가족과 친구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씨도,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온순한 성격도, 다 우리 부부와 조상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이니, 누굴 닮아 저모양이냐고 한탄하거나,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비판하지 않아야 한다.
코난군이 조만간 원하는 전공과 직업을 찾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아직 인생 경험이 부족한 코난군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그 중에서 코난군의 성향을 고려하면 어떤 것을 추천하는지, 등을 말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처럼 계속해서 늘 과제를 확인하고, 부족한 과목의 공부를 하게 하는 (주로 남편이 도맡아서 하는 일이다) 일을 해야할 것이다. 언제쯤이면 부모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성적 관리를 잘 할 수 있을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꾸준히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될 지, 그건 모르겠다. 그냥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다행히도 아빠의 부단한 조력 덕분에 이번 성적표에도 모든 과목에서 에이를 받기는 했다. 깜빡 잊고 과제를 빠뜨린 과목도 다른 과제와 시험에서 겨우 턱걸이로 만회해서 에이를 받았으니, 남편의 공로에 감사한다.
2023년 3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