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4
무용(無用)한 것들이 아름답다: 코난군의 테니스 사랑

무용(無用)한 것들이 아름답다: 코난군의 테니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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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감동깊게 시청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에서 친일파 가문의 도련님이지만 남몰래 독립군을 돕던 김희성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사실상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없고,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 말에 공감한다. 아름다운 음악이나 미술작품, 그런 것들이 없어도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생활에 써먹을 일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아름답기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 드라마에서는 일제의 강점이 깊어만 가는 암흑과도 같은 시기에 조선의 독립이란 절대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무용한 말이지만, 그래서 그것을 지지하겠다는 주인공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사이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희성이 고애신에게 하는 대사

며칠 전에 후배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는 것 하나 없는 무용한 짓을, 후배인 한교수 부부도, 우리 부부도 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했다 ㅎㅎㅎ
후배의 아들과 우리집 코난군은 같은 학년이고 부모의 성향과 배경이 비슷하다는 점 외에도, 운동 종목 하나를 무척 좋아하고 열심히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축구나 테니스를 좋아해서 그냥 공을 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토너먼트 라고 부르는 대회에 참가하고 대학을 갈 때에도 학교 대표 선수로 뛸 수 있는 학교를 지원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한국의 체육특기생 처럼, 미국 대학에서도 운동 종목별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 대표 선수로 활동하다가 대학 졸업 이후에는 프로 선수로 진출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운동 선수들 중에서 프로 선수로 살아남아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은 극소수이고 그것도 미식축구나 야구같은 인기 종목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코난군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아빠를 따라 테니스 코트에 나갔고 첫 라켓은 두 살에 잡았지만, 로저 페데러 같은 월드 스타가 되는 것은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보다 더 낮다. 그것은 마치, 어릴 때 동네 피아노 교습소 두어달 다녀본 경험과 모짜르트 처럼 위대한 음악가가 될 가능성을 연결지으려 하는 것과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캡쳐한 코난군이 테니스 치는 모습

심지어 운동은 미술이나 음악과 달리, 아무리 계속하고싶은 의지가 있어도 부상을 입거나 키가 더 자라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의 이유로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운이 좋아서 부상을 입지도 않고 신체 조건도 운동 종목에 맞게 잘 자라서 프로 선수가 된다해도, 그 직업을 몇 살 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월드 스타가 못된다면 테니스로 할 수 있는 밥벌이는 학교나 운동 클럽의 코치가 되는 것인데 박봉에다 안정적이지도 못한 직업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코난군이 테니스를 직업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는다. 코난군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테니스는 진지하고 열심히 하되, 대학 전공과 직업으로는 좀 더 유망하고 안정적인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미국 대학 운동팀은 NCAA (National Collegiate Athletics Association) 라는 거대한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그 안에서 각 종목별로 디비젼 1, 2, 3으로 나뉘어 있다. 디비젼 1과 2는 대학 졸업 후 프로 선수로 나갈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로 구성되어 있고, 학생들은 대학에서 전공을 따로 정하고 수업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상 졸업 후 진로는 운동 선수의 길을 많이 선택한다. 말하자면, 예비 프로 선수의 길이어서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동시에, 매 시즌 몇 경기 이상 참가해야 한다는 계약서를 쓴다. 반면에 디비젼 3 대학교들은 장학금도 주지 않지만, 덕분에 학생 선수들이 구속받는 정도도 덜하다. 순수한 아마추어 선수라고 볼 수 있다.

테니스코트 벽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친구들과 경기하는 모습을 녹화한다.

후배의 아들과 우리집 코난군은 각기 축구와 테니스를 좋아하고 또래 아이들에 비해 잘하기는 하지만, 디비젼 1이나 2 대학교에 스카웃 받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디비젼 3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교 대표로 뛰며 계속해서 운동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디비젼 3 이라고 해도 보통의 실력으로는 선수로 발탁될 수는 없다. 공식 대회에 나가서 어느 정도 이상의 랭킹을 유지해야 하고 종목에서 인증하는 점수도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레슨도 따로 받고 타주에서 하는 대회에도 부지런히 참가해서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름 방학 동안에는 거의 매주 주말마다, 학기 중에도 시간이 날 때 마다 토너먼트에 참가하는데, 코난군 뿐만 아니라 데리고 다니는 코난아범의 시간과 노력이 매우 많이 들어간다.

그나마 코난군은 개인 종목이어서 참가할 대회를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골라서 갈 수 있고, 그래서 아빠가 운전해서 데리고 다니니 비용도 적게 들어가는 편이다. 후배의 아들은 단체종목인 축구를 하다보니, 참가할 대회를 팀에서 정하고 그 대회가 어디가 되었든 참가해야 한다. 운전해서 갈 수 없는 거리도 있어서 비행기를 타고 대회에 참가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만약에 개인 사정으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해도 참가비는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많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장학금도 안주는 디비젼 3 대학교를 진학하려 하는 것은, 완전히 밑지는 장사인 것이다.

코난군이 테니스 비디오를 포스팅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페이지 캡쳐 https://www.youtube.com/@BlacksburgTennis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https://www.youtube.com/@BlacksburgTennis

테니스 종목 디비젼 3 대학교 중에는 공부를 아주 잘해야 갈 수 있는 명문대학도 여럿 있다. 엠아이티 라든지 칼텍이나 존스 홉킨스… 물론 디비젼 1 대학교 중에도 명문대는 여럿 있다. 하버드, 스탠포드, 프린스턴, 예일 등등… 그런데 그런 명문대에 입학하려면 토너먼트에 다닐 시간과 노력으로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생산성이 더 높을 듯 하다. 물론 SAT (미국 수능시험) 점수를 몇 점 더 높게 받았다고 해서 하버드나 엠아이티 같은 학교에 합격할 확율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런 최고 명문대학교는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아이들이 지원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가리는 것은 제비뽑기와도 같다 (이전 글에서 이에 관해 쓴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들의 돈안되는 운동을 지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용(無用)한 아름다움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그 무엇 하나에 깊이 파고들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러면서 좌절과 성공을 모두 맛보고… 하는 경험이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거나 장학금을 받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컴퓨터 게임이나 이단 종교에 심취하는 것보다는 운동에 심취하는 것이 더 건전하기도 하다.

좋아하는 운동 덕분에 좋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고 (토너먼트에서 만난 아이들과 연락처를 주고 받거나 다음 대회에서 또 만나자고 인사를 할 정도로 사람을 사귀고 있다), 성실한 생활습관을 갖게 되고 (좋은 신체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건강한 음식을 먹게 됨),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학교 공부나 오케스트라 연주, 미술, 등의 다른 취미생활도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함께 테니스를 하는 학교 선배들과 비디오를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는 재미도 생겼는데, 덕분에 비디오 편집 기술도 늘었다.
이왕에 포스팅 하는 김에, 그냥 재미로 우스꽝스런 장면만 올릴 것이 아니라, 백핸드 스트로크의 바른 자세, 로빙 띄우는 법, 등등 초간단 테니스 기술 강좌를 편집해서 올려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렇게 하면 테니스 초보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커뮤니티 서비스가 되어서, 대학 입학 지원 에세이를 쓸 때 좋은 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용(無用)한 것을 지향한다고 해놓고서는, 코난군의 테니스가 얼마나 미래 인생에 쓸모가 많은지를 가득 썼다는 것을 깨달으며 글을 마친다 ㅎㅎㅎ

2023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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