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귀한 참기름 한 병이 우리집에 온 이야기

정말 귀한 참기름 한 병이 우리집에 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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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관련 글:
https://www.apiacere.net/2022/01/27/르완다에서-온-커피/

버지니아 공대를 며칠 전에 졸업한 과일 이름과 같은 이름의 여학생이 있다. (편의상 과일양이라 부르기로 함)
과일양은 두 딸 중에 막내이기도 하고, 성격이 유순한 편인데다, 부모님이 사는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혼자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이 부모에게는 무척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대학에 보내는 경험은 아직 하지 못했지만, 그 부모의 마음이 아주 잘 이해가 되었다. 꽤 오랫동안 못볼 아이에게 좋아하는 음식인 갈비찜을 해주고 떠나겠다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조차 찡해져서 나도 모르게 내 연락처를 주고, 대학 생활 중에 갑자기 급한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말했는데, 그 때부터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내가 만든 과일양의 졸업 선물

사실상 나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곤란하거나 큰 일이 생기지는 않아서 내가 과일양을 위해 해준 일은 별로 없다. 개강이나 종강 시즌이 되면 별 일 없는지 문자로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였고, 일 년에 한 번 김장을 할 때 김장 김치를 조금 나눠주거나, 직접 만든 만두같은 음식을 몇 번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그래도, 다급한 도움이 필요할 때 전화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하기는 했을 것이다. 과일양 보다도 과일양의 부모가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과일양의 부모님은 내게 자주 르완다 커피를 보내주었다. 작년 여름에는 큰 딸의 결혼식을 치르느라 미국을 방문한 김에 우리 동네에도 왔고 우리집으로 초대를 해서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들은 아프리카 이야기와 르완다에서 일하는 한국인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어디에 어떤 나라가 위치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던 내게 새로운 간접경험이었다.

과일양의 이름을 브로치로 만들어 달았다 🙂

이번에는 졸업식 참석차 과일양의 부모님이 우리 동네에 오게 되었는데, 우리 부부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졸업시즌으로 붐비는 동네 레스토랑에 가면 느긋하게 오래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고, 맛은 별로인데 비싸기만 한 음식에다 팁까지 얹어서 주어야 하는 것이 아깝게 여겨져서 그냥 우리집으로 오라고 초대를 했다. 함께 온 과일양의 언니와 형부도 다 같이 오라고 했다.
이렇게 쓰고보면 내가 무척 인심이 후하고 아무에게나 친절한 사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아무나” 불러다가 밥을 해먹이는 것이 아니고, 레이더를 잘 돌려서 내 밥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초대하는데, 그걸 티내지 않을 뿐이다 ㅎㅎㅎ
과일양의 부모는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무척 선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일양도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김치나 만두를 얻어먹을 때마다 깎듯이 인사를 했고 문자로 안부를 나눌 때도 늘 예의가 발라서 부모의 가정교육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 밥을 먹을 자격이 아주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염치를 차리고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은 참 귀하다. 그 몇 안되는 사람들 하고만 친하게 지내며 사는데, 과일양 가족이 내 리스트에 추가되어서 내가 더 반갑고 기쁘다.

팥을 삶아 갈아서 우뭇가사리 가루로 직접 만든 밤양갱

과일양의 졸업식 일정과, 우리 아이들의 학년말 여러 행사 일정을 고려해서 식사 초대 날짜를 잡다보니 목요일 점심 시간이 유일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목요일 점심은 초대 음식 준비에 가장 나쁜 날이다. 오아시스 마트에 신선한 식재료가 들어오는 것이 목요일 오후이기 때문이다. 목요일 저녁 식사만 해도 오후에 장을 봐와서 요리할 수 있지만, 목요일 점심을 준비하려면 어떤 식재료는 아예 구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메인 요리 하나에다 밥과 국으로 집에서 늘 먹는 소박한 엄마 밥상을 차리기로 했다.
메인 요리인 갈비찜은 과일양이 좋아하는 음식이고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음식인데, 재료 구입도 오아시스 마트가 아닌 미국 마트에서 다 구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 쌀밥과 된장국, 계란말이, 오이무침, 같은 미국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재료와 김치 냉장고에 있는 김치로 음식을 준비했는데, 먼 거리 여행을 온 손님들의 입맛에는 소박한 집밥이 오히려 더 좋았을 것도 같다.

과자 포장 틀에 굳히니 밤양갱이 더욱 근사한 모양이 되었다.


후식으로는 직접 팥을 삶아 만든 밤양갱을 준비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명한 밤양갱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은 달디단 밤양갱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 노래가 유행을 하면서 제과업계에서 양갱 제품이 잘 팔리고 있다는 뉴스도 보았다.
우리 동네 오아시스 마트에는 가끔 양갱을 팔 때가 있는데 손가락만한 양갱 네다섯 개가 들어간 한 상자에 5달러쯤 한다. 오아시스 마트의 다른 쪽 코너 선반에서 5달러 하는 팥을 한 봉지 사고, 한 팩에 1달러도 안하는 우뭇가사리 가루, 5달러쯤 하는 까놓은 삶은 밤을 사면 배가 부르게 먹을 만큼 양갱을 만들 수 있다.
이 날 손님 초대에서 후식으로 먹고, 손님들에게 싸주기도 하고, 그러고도 많이 남아서 온가족이 간식으로 먹고 있다. 남은 팥으로는 서너번은 더 만들어 먹을 수 있겠다.

과일양의 할머니께서 손수 농사지어 짠 참기름

이번에도 과일양의 부모는 르완다 커피를 선물해주셨는데, 올해 갓 수확한 신선한 생두를 주셨다. 그 뿐만 아니라 과일양의 언니는 싱가폴에서 사온 차를 선물했고, 과일양의 할머니는 아흔의 연세에 손수 농사지어 짠 귀한 참기름을 보내주셨다.
한인 마트에서 파는 오뚜기 참기름만 사먹던 내게는 참기름의 색깔부터 진귀해 보였다. 기름이 흐르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싸매고 한국 신문지로 겹겹이 싼 포장 마저도 열어보기가 황송했다.
내게 김장 김치를 얻어 먹었던 과일양은 이제 직접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후배 한국인 학생들에게 직접 담은 김치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인류애가 이렇게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 같다. 🙂
이제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과일양의 미래에 축복을 빌고, 인류애를 나눠주신 과일양의 일가족 모두에게 감사한다.

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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