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코난군이 소속한 로아녹 청소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겨울 연주회를 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로아녹까지 가서 연습을 하고 해마다 겨울 방학 즈음에 한 번, 학년이 끝나가는 5월에 한 번씩 연주회를 하는데, 중학생때 가입한 코난군은 이제 벌써 몇 년째 해오는 콘서트라서 능숙하다.
로아녹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부속으로 중학교 고학년과 고등학생 단원을 모집해서 꾸리는 유스 오케스트라에는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계 아이들이 많이 있다. 아이들 교육에 열성인 동양인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음악을 배우게 해서 그런 것 같다. 로아녹은 우리 마을에서 45분이상 운전해서 가야 하는 도시이지만, 이 근방에서 교육열 높기로 으뜸가는 우리 마을 아이들이 절반 가까이 된다.
코난군은 아트 레슨을 같이 받고 있는 줄리아와, 예전에 태권도를 같이 배우면서 알게된 민형이와 함께 카풀을 하고 있다. 세 아이들의 부모가 한 주일씩 번갈아 로아녹까지 왕복 운전을 하는 것이다. 코난아범은 오케스트라 연습 장소가 자신의 연구실과 가까워서 두세시간 동안 연구실에 가서 기다릴 수 있지만 다른 두 아이의 부모는 쇼핑을 하거나 차 안에서 연습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린다.
우리 학교 동료 교수의 자녀 (미국인)도 있고, 코난군의 학교 친구 (미국인)들도 있는데 그들은 직접 운전을 해서 연습에 참석하거나 부모가 매번 라이드를 해주는 것 같다.
연주회 프로그램에 아이들 이름이 나와있는데 한국 이름만 여섯 명이고 중국이나 베트남 성을 가진 아이들도 여럿 보인다. 그런데 그 이름들 중에 이씨 한 명은 미국인인데 성이 Lee 여서 자칫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오인하기 쉽다. 보 라는 남자 아이는 코난군과 동갑인데 코난과 같은 시기에 오디션을 받았다. 보와 코난군은 모두 제1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코난아범은 코난군의 생물 공부를 열심히 시키고 있다. Advanced Placement의 약자로 AP 라고 하는 높은 수준의 수업을 듣고 있는 코난군은 다른 과목은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통계와 생물은 교사가 다소 체계적이지 못해서 코난군이 혼자 수업 내용을 따라가며 공부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일주일마다 한 단원을 마치고 매주 시험을 보게 한다면 아이가 주말 동안에 시험 공부를 할 수 있겠지만, 진도를 규칙적으로 나가지 못하여 어제 배운 내용을 오늘 시험보게 하고 바로 다음날 또다른 내용을 가르치고 곧 이어 또 시험을 보게 하니 코난군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아이들이 혼란을 겪으며 배운 내용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책은 집에서 선행학습으로 미리 배울 내용을 알게 하면 교사가 아무리 급하게 가르치더라도 이해를 할 수 있고 따라서 시험 성적도 잘 나오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코난아범과 코난군은 생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이 쉽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몇 시간씩 서재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코난군은 방학인데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도 못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불만이고, 남편은 아이가 열성적으로 따라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내가 달리 도울 방법도 없고, 그저 양쪽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코난군이 이런 걸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놀고 싶은 코난군과 공부를 많이 시키고 싶은 아빠의 바람을 모두 반영하는 시간표를 만든 것이다. 누구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 순전히 혼자 생각해낸 시간표는 상황에 따라 1, 2, 3번의 옵션을 따르게 되는데 그 어떤 옵션이라도 최소한 공부 시간이 5-6시간 이상이 되고, 코난군의 자유 시간도 3-4시간이 확보되어 있다. 매일 운동 시간과 독서 또는 타자 연습 시간도 들어가 있다. 위의 시간표에서 데이 1의 옵션이 별다른 일 없는 보통의 날이고, 데이 2나 데이 3은 코난군이 친구들과 만나 놀 약속이 있는 날에 유용한 스케줄이다. 데이 2는 점심 약속, 데이 3는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라도 공부할 시간을 잘 마련해둔 스케줄이다.
나는 코난군의 창의력과 적응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놀고 싶은 욕구만을 주장하지 않고, 아빠의 바람을 반영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단순히 성적만 잘 받아오는 모범생보다도 훨씬 더 능력있고 성숙된 사람의 모습이다.
남편에 비하면 무척 느긋한 성격인 나는, 솔직히 말해서 코난군의 생물 성적이 에이가 아니어도 큰 불만이 없다. 사지육신 멀쩡하고 밥 잘먹고 잠 잘자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인 것만으로 내가 코난군에게 더 바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AP 수업에서 받은 성적은 일반 수업에서 받은 성적보다 높은 등급으로 평가되는 방식이다. AP 생물 성적이 B라면, AP가 아닌 일반 생물을 수강하는 아이들의 A와 같은 급으로 성적 합산이 된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대학 입시에 제출하는 내신 성적 산정 방식이 무척 복잡한데, 쉽게 설명하자면 코난군은 이미 높은 수준의 수업을 듣고 있기 때문에 굳이 A를 받지 못하더라도 일반 수업을 듣는 아이들 보다는 성적이 더 높게 나온다.
나의 과도한 느긋함이 아마도 코난군에게 유전되었는지, 코난군은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안그런 아이가 있으랴만은…). 반면에 남편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성격이다. 그러니 AP 클래스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최상위 성적을 받아야만 만족할 수 있다. 내가 비록 느긋한 사람이기는 해도 남편의 그러한 성향에 동의하고 지지한다. 코난군이 이왕이면 게으른 나보다도 부지런하고 열심인 남편을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이런 우리 모두의 바람을 담은 시간표를 코난군이 스스로 만들어 냈으니 대견한 마음으로 매일 12시 점심과 6시 저녁 식사 준비를 칼같이 시간을 지켜 해주고 있다. 식사 시간이 정해지니 나도 참 편하다. 배가 고프든 아니든간에 12시와 6시로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그 시간에 맞추어 밥상을 차려놓고 치우면 된다. 아이들도 스스로 간식을 찾아 먹을 때 다음 식사 시간에 맞추어 먹는 양을 조절하게 되니 계획적인 삶을 살게 되는 잇점도 있다. 여러 모로 보람차고 즐거운 겨울 방학이다.
2024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