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이 글은 코난군이 잘 나가는 이야기가 글 내용의 대부분이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픈 지병이 있는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이제 한 달 정도 후면 코난군은 주지사 여름 학교에 가게 된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에서는 각 주마다 있는 주지사가 그 주의 대통령 쯤 되는 지위이다. 연방법 (모든 주에서 통용되는 공통적인 법) 외의 주 별 법이나 제도를 관장하는 것이 주지사의 일이다. 주지사의 부인을 퍼스트 레이디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주지사의 높은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주지사가 주지사 학교 (Governor’s School) 를 관장하고 있기도 한데, 버지니아 주에서는 학기 중 학교와 여름 학교 두 가지 모두 시행하고 있다.
학기 중 주지사 학교는 시골 지역 작은 학교에 다니는 우수한 학생들이 AP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것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코난군이 다니는 블벅고에는 AP 수업을 들을 정도로 학업능력이 높은 학생들이 아주 많고 대학교 수준의 수업을 가르칠 교사진의 실력도 뒷받침 되는 덕분에 학기중 주지사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내 직장 동료의 아이 하나는 학기중 주지사 학교를 다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서 학교 버스를 한 시간 동안 타고 주지사 학교로 가서 오전 수업을 받고 (수준 높은 AP 수업), 오후에는 다시 학교 버스를 타고 원래 다니는 고등학교로 돌아와서 나머지 과목 수업을 받는다고 하니, 매일 얼마나 피곤할까 싶다.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아주 외곽의 시골 지역이어서 학생 수도 적고, 그 중에 AP 수업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나 가르칠 정도로 자격을 갖춘 교사가 드물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여름 방학이 되면 주지사 여름 학교가 버지니아주 대학 캠퍼스 곳곳에서 열린다. 3주일 동안 대학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며 지정된 분야의 공부를 하는데, 학교 성적을 받기 위한 공부라기 보다는 여름 캠프처럼 다양한 활동과 체험을 하게 한다. 여름 학교 역시 주지사가 제공하는 것이어서 학비나 숙식 비용은 주정부에서 모두 부담한다. 즉, 공짜로 수준높은 여름 캠프를 숙식제공까지 받으며 3주간 참여하는 좋은 기회이고, 그러다보니 참여하고 싶은 학생들이 많아서 경쟁을 해야 한다. 해당 분야의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어야 하고, 담당 교사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제출하고, 지원서를 잘 써야 한다.
지난 겨울에 그 모든 지원 과정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려왔는데 4월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버지니아 주 고등학교 교과과정은 외국어 과목을 수강하도록 하는데 코난군은 독일어를 선택해서 세 학기를 배웠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선생님이 코난군을 예뻐해 주시기도 했고, 같이 수업을 받던 아이들도 모두 착하고 좋은 아이들이어서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래서 주지사 여름 학교를 독일어 과목으로 지원했다. 버지니아 주 전체에서 몇 십 명 선발하는 과정에 합격했으니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다. 3주일 동안 영어는 사용하면 안되고 독일어로만 말해야 하는 규칙이 있고, 학생들의 프로그램 참여를 높이기 위해서 전화나 컴퓨터는 아예 소지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어서, 코난군에게는 무척 새롭고 유익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지난 월요일은 코난군이 캡틴으로 있는 학교 테니스 팀의 리그 마지막 경기가 있었다. 로녹, 린치버그 등, 반경 두 시간 거리 안쪽에 있는 학교 팀들과 리그전을 하는데 한 번은 홈 경기, 또 한 번은 어웨이 경기로 같은 학교 팀과 두 번씩 겨루게 된다. 어웨이 경기를 갈 때는 학교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 운영비를 절약하려고 같은 학교 다른 운동 팀이 같이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지난 월요일의 게임은 로녹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있었는데, 남자 테니스 팀 뿐만 아니라 야구 팀도 함께 버스를 타고 가서 그 학교 운동장에서 각기 게임을 했다.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 식으로 경기 스케줄을 짜두는 것이다.
블벅고 남자 테니스 팀은 기량이 뛰어나서 이번 시즌에서 단 한 번도 다른 학교에게 진 적이 없다. 그런데 마지막 경기였던 월요일은 어쩐지 두 팀이 막상막하로 경기를 해서 가장 마지막에 단식 경기를 했던 코난군의 승부 결과에 따라 팀 전체의 승패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단식 6 경기, 복식 3 경기, 그렇게 모두 9경기의 결과로 전체 팀의 승패를 가르는데, 강팀인 블벅고는 대부분 9-0, 못해도 6-3 정도의 전적으로 이겨왔다.
하지만 이 날은 여러 가지 상황이 좀 복잡했다. 학교의 코트가 모자라서 모든 선수가 한꺼번에 경기를 치를 수가 없었고, 상대 학교 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시니어 선수를 축하하는 게임이어서 많은 수의 가족들이 응원을 왔다. 블벅고 선수들은 어웨이 게임이어서 상대적으로 응원할 가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홈경기의 잇점과 많은 응원단 덕분인지 상대 학교 팀 선수들이 잘 해서 4-4 동점을 기록하고 있는 중에 코난군의 경기가 마지막으로 시작되었다.
코난군이 이기면 팀이 이기고 코난군이 지면 팀이 지는 상황이니, 심적 부담이 큰 게임이다. 그런데 코치 데이비드는 여기에서 정말 감탄할 정도의 지도력를 보였다. 코난군에게는 현재 팀의 점수가 4-4가 아니라 5-3 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코난군과 동시에 경기를 하던 아이의 결과를 코난군은 미처 알지 못하는 상황) 네가 이 게임을 져도 우리 팀은 어차피 이기게 되어 있으니 부담갖지 말라는 조언을 한 것이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팀 응원석으로 가서 우리팀 캡틴이자 1번 선수인 코난군은 테니스 실력은 뛰어나지만 정신력을 더 키워야 할 필요가 있으니 부디 더욱 목청을 높여 응원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코난군도 그 말을 다 듣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코치 데이비드는 코난군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멘탈을 키우도록 독려를 한 것이다. 사실, 내가 봐도 코난군은 마음이 여리고 귀가 얇아서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흔들리는 일이 가끔 있을 정도로 유순한 아이인데, 코치는 코난군의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했고, 그에 아주 잘 맞는 방법으로 그 약점을 강화하도록 이끌었다.
상대방 응원자들은 시니어 고별 경기를 축하해주러 온데다, 반대편 팀 코치가 열심히 응원해달라는 부탁까지 받으니, 상대팀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낄 필요도 없이 마음껏 소리지르며 응원을 했다. 그러자 먼저 경기를 마치고 기다리던 블벅고 야구팀 아이들이 우리도 질 수 없다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서로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고 한다.
모두가 지켜보는 마지막 경기에서 코난군이 이기고, 그래서 팀도 이기게 되자, 야구부 아이들이 최후의 승자가 학교 버스에 오르는 길목에서 축하 세레모니를 해주었다.
이런 맛에 아이들은 운동을 하고 부모들은 그 뒷바라지를 하나보다.
2025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