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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나의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

오랜 외국생활 뒤 귀국하자마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속에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힐난하는 반어법의 어조가 담긴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나의 순전한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들을 때였다. 실제로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뒤집어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천박한 사회라 할지라도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미 그 선을 넘어 ‘소유’(당신이 사는 곳)가 ‘존재’(당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진정한 ‘사회개혁’은 무엇보다 새로운 가치관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세력이 진정한 개혁세력이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와 긴장하면서 공공성과 연대의식에 기초한 새로운 가치관이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모색하고 제도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에서 말하는 능력이, 기존 사회귀족의 그것과 개혁세력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실용주의 노선은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아래 사회 구성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유재산 축적 노력에 공공성조차 개입하지 않게 하면서 기존 사회귀족의 물신주의 헤게모니에 더욱 귀의하도록 작용하고 있다.

고유 업무와 무관하므로 불법·탈법의 땅투기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나온 발언이다. 이것은 한 인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개혁’ 세력의 가치관에서 사회귀족의 가치관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적 감수성이 사라졌을 때, 개혁의 건강한 긴장은 유지될 수 없다. 가령 국가보안법 폐지에는 국민 과반수가 반대한다는 이유라도 있다면,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계속 표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학재단의 집요한 로비활동과 물량공세 가능성에 저항할 만한 개혁 담지자로서의 가치관이 없는 탓 아닌가?

지금까지 ‘해먹던 놈이 또 해먹는’ 역사의 반복에 그래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현실 이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표방한 세력이 사회 상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오늘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실패하고 실용주의를 내걸 때, ‘그놈이 그놈’인 현실은 그대로인 채, 4·30 재보선 결과가 보여주듯이 독재자의 현판은 물신주의와 함께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출발이 남과 달라서 수백억원대의 재산가인 홍석현씨가 탈세 전력에도 불구하고 ‘개혁’ 세력에게서 능력을 인정받고, 삼성의 ‘무노조’ 신화와 그 관철을 위한 각종 노동 탄압이 ‘개혁’세력에게 아무런 윤리적 부담도 주지 않는 현실이다. 그런 삼성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행위의 부당함을 지적한 학생들에게 ‘젊은이들의 열정’을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인문정신을 파는 행위까지 마다지 않은 대학 당국의 비굴함에 대한 반응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개혁’ 세력이 사회귀족의 가치관, 그리고 골프, 원정출산, 조기유학, 고액과외, 부동산, 주식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의 문화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를 보여주기는커녕 스스로 물신주의 가치관에 포섭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 세력에게서 ‘민중’이 사라졌을 때, 새로운 가치관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들보다 인문학을 돈 주고 판 대학 당국에 항의한 고대생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본다. 대신 대학당국의 인사들과 오히려 학생들을 꾸짖는 ‘점잖은’ 인사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말이 있다. 부자 되기 전에 “사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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