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를 격은 많은 사람들에게 1987년 큰 의미의 한 해였고,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싸워서 얻어낸 직선제를 독재자의 친구에게 헌납할 수 없어서 그 해 겨울엔 유난히도 많은 나날을 바깥에서 보내야 했다. 벽보를 붙이러 나갔던 구로공단은 왜 그리도 추웠는지 (왜 못사는 동네는 추웠는지). 선거는 날치기 당하고, 명동에서 부정은 외치다 크리스마스를 맞았고, 그 목소리는 해를 넘기며 사그러들고 말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엔 친구와 함께, 명동에서 돌아다니다 택시비가 없어서 돌아다니면서 버티다, 막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남대문 시장에서 칼국수를 사먹고 (칼국수 사 먹을 돈은 있었는 듯?) 첫 버스를 타고 자치방으로 돌아왔다. 저녁 늦게 친구랑 만나서 카페에서 한참을 이야기 하며 보냈지만, 자정도 되기 전에 카페가 문을 닫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본의 아니게 자정 쯤에 도착한 곳은 명동 성당. 자정 미사에 참석을 했다. 본 성당엔 들어가지 못하고 옆의 작은 미사에 참석했는데, 한 신부님이 추기경이 미리 배포한 미사 내용을 읽었다. 순진해 마지 않았던 그 땐, 추기경의 말이 그렇게 현자의 이야기처럼 들렸을 수가. 대충 기억하면 이렇게 이야기 한 것 같다. “우리는 이제 막 민주주의 씨앗을 뿌려놓고, 벌써 그 열매을 따려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길었던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새해를 시작하기엔 누구 말처럼 feel 이 꽂히는 그런 말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접어 들었을 때, 운동권 학생들이 명동 성당에 농성을 하면서 추기경에게 요구를 한 적이 있었다. 추기경이 나서서 양김을 설득해서, 단일화를 시켜달라고. 그 때 추기경은 화를 내면서 성직자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면 안된다며 거절했었다. 사실 난 그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진 않지만 옳은 처신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처신과 미사 때의 말 등으로 난 얼마동안 추기경을 나의 존경하는 사람 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좀 서글퍼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그의 원래의 모습이라고 한다. 로메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동의했다. 엘살바도르 민주화를 외치치다 암살당한 그가 원래 민중의 편에 섰던 주교가 아니었다. 그가 원래 그랬었더라면 그는 주교가 되지도 못했고, 우린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도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난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아니었던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현자의 침묵이 우자의 아우성보다 더 그리울 때가 있다.
법정스님이 명동성당에서 강연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경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말씀 전에서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