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로 만드는 전채요리: 홀 박사님과 함께 했던 요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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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홀 박사님댁을 방문한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에는 트레버 시어즈 박사님 댁에서 연구그룹의 모든 포스닥을 초대한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남편도 일한 적이 있는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의 화학과 홀+시어즈 연구그룹은 물리학과 화학을 접목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각기 다른 화학물질에다가 레이져를 쏘아서 거기서 나오는 파장?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뭐 그런 일을 한다 :-), 홀 박사님과 시어즈 박사님 두 분은 예전부터 그룹 내의 연구원들을 자주 불러다가 먹이고 다독이고 하는 좋은 상관이었다.

시어즈 박사님 댁에서 메인 요리를 준비하지만 홀 박사님도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전채요리를 준비해 가기로 했는데, 매사에 치밀한 홀 박사님은 그렇게 대규모 요리를 하기 전에 미리 소량으로 만들어보고 먹어본 다음 분량이나 조리법을 수정하곤 한단다. 그래서 토요일 아침상을 물린 다음부터 요리 연습에 들어갔는데, 요리에 (비교적) 관심이 없는 사모님 페니는 우리 아이들을 마당으로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며 부엌을 조용한 연구실이 되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홀 박사님의 조수가 되어서 함께 요리를 하고 맛에 대해 토론했다.

이 날의 요리는 구운 비트로 만드는 전채요리였는데, 원래 이 요리의 유래는 이탈리아(? 확실치 않음) 에서 날 쇠고기를 얇게 썰어서 그 위에 리크 라고 하는 향신채소를 얹어서 먹는 것인데 날 쇠고기는 잘 먹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날씨가 더우면 상할 우려도 있고 하니 쇠고기와 색깔이 비슷한 비트를 구워서 대체해서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학자인 홀 박사님은 리크 대신에 마늘과 파를 얹어서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화씨 400도의 오븐에 비트를 껍질째 한 시간 동안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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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도에 한 시간, 이건 마법의 온도와 시간이라고 내가 말했다. 고구마를 구울 때도, 옥수수를 구울 때도 이 온도에 이 시간이면 타지 않고 딱 알맞게 잘 익기 때문인데, 비트도 마찬가지였다. 타지 않고 덜익지도 않고 잘 익었다.

다 익은 비트는 껍질을 벗기고 얇게 썰어야 하는데 충분히 식어야 썰기 좋기 때문에 식을 때까지 옆에 두고, 다른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늘을 얇고 길게 썰어서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두른 후라이팬에 완전히 익도록 볶았다. 그 다음에는 페이퍼 타올 위에 얹어서 기름기가 흡수되도록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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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파를 얇게 썰어서 마늘과 마찬가지로 후라이팬에 올리브오일로 볶았다. 원래는 리크라고 하는 야채를 쓰는데 리크는 잠시만 볶아도 바삭바삭하게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파는 수분이 많고 끈적한 진액이 있어서 바삭바삭할 정도로 볶는 것이 쉽지 않았다.

33.jpg볶은 파도 페이퍼 타올 위에 놓아서 기름을 뺐다.

34.jpg그 사이 비트는 다 식어서 얇게 저며서 썰었다. 비트는 무와 비슷한 식감인데 고구마처럼 달큰한 맛이 난다. 

35.jpg산양유 치즈에다가

36.jpg딜 이라는 향신채소를 넣고 섞어주었는데, 나중에 맛을 보고 분석한 결과 딜은 넣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원래 산양유 치즈와 딜은 서로 맛과 향을 잘 보완해주는 재료라서 흔하게 함께 쓰지만, 이번 요리에서는 파의 강한 향과 딜의 향이 서로 상충되어서 맛의 조화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37.jpg얇게 썬 비트를 놓고

38.jpg치즈를 올리고

39.jpg잘게 부순 호두를 뿌리고

40.jpg바삭하도록 볶은 마늘과 파를 얹은 다음

41.jpg마지막으로 올리브오일로 만든 고추기름을 뿌려주면 완성이다.

42.jpg 접시가 검은색이라 사진이 잘 안나오는 것을 보시더니 흰 접시를 꺼내서 새로 담아주셨다.

43.jpg맛을 보았더니 앞서 말한대로 딜과 파의 향이 각기 너무 강한데 둘이 조화롭게 섞이지 않았다. 그리고 치즈와 호두와 고추기름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느끼한 맛도 강했다. 역시… 그래서 미리 연습을 해봐야 하는 거였다. 용의주도한 홀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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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에 넣은 딜을 나더러 손으로 다 골라내라는 농담을 하며 웃다가, 이건 놔두고 새 치즈를 꺼내서 만들까? 하고 궁리도 해봤다가, 비트는 신맛과 잘 어울리니까 라임즙에 담궈놓았다가 요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셨다. 홀 박사님의 가설은, 비트가 원래 신맛과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비트가 마르지 않고 촉촉함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니 한 번 시도해볼만 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비트는 피클로 만들어서 많이들 먹는 야채이고, 무와 비슷한 식감이니 식초와 같은 신맛과 조화를 잘 이룰 것도 같았다.

라임즙을 짜서 비트를 담궜다 건져서 치즈와 호두는 분량을 확 줄여서 얹고 나머지 재료는 그대로 사용해서 만들어보니, 먼젓번에 먹은 것에 바해 맛이 월등히 개선되었다. 딜과 파의 향이 상충되는 문제도 라임즙이 해결했다. 라임과 딜의 맛이 합쳐지니 파하고도 원만하게 맛이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또한 느끼한 맛이 나는 재료의 양을 줄이고 라임의 상큼함이 느끼함을 한 번 더 잡아주니 그것도 좋았다.

아마도 원래 재료인 리크를 사용했다면 같은 서양 채소인 딜과도 잘 어울렸을 것이고 이렇게 오만 궁리와 고심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게다. 하지만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한 번 더 각 채소 고유의 맛과 향을 연구하게 되고, 또 서로 잘 어울리는 다른 맛을 발견하게 되는 이로움이 있다. 내가 개발한 요리라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고.

항상 호기심이 많고 도전정신이 강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내 남편은, 홀 박사님의 자신보다 한 술 더뜨는 과학자 기질을 존경한다. 홀 박사님도 수많은 포스닥을 연구원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오랜 세월 연구를 해왔지만, 내 남편을 누구보다 각별히 여기는 듯 한데, 아마도 자기와 성향이 비슷해서 동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나마 함께 연구활동을 함께 해보니 홀박사님의 성격을 잘 알겠고, 그 성격이 낯설지 않고 매우 친숙해서 – 십 오년 함께 살아온 어떤 사람의 성격과 흡사하다 – 재미있었다.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십 년 후에 또다시 놀러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 홀 박사님 내외에게 영어로 출판된 한국 요리책 두 권을 감사의 선물로 보냈다. 올 크리스마스에도 남편은 홀 박사님과 시어즈 박사님께 카드를 보내겠지…

2015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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