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우리 학교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아동 도서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뉴버리 상을 받은 작가 씨씨 벨 (Cece Bell) 이 강연을 하고 싸인회도 하는 행사였다.
유아교육을 가르치다 보니 아동문학이나 도서에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늦은 저녁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참석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우리 학과 동료 교수가 주관하는 행사라서 학과 동료들이 품앗이 차원에서 많이들 참석하는 분위기였고, 또 한명숙 선생님께서 한국에서도 출판된 유명한-그리고 감동적인-책의 저자라며 꼭 참석하라고 권하기도 해서 남편에게 아이들 하교 및 저녁 식사를 부탁해놓고 참석했다.
엘 데포 라는 말은 청각장애를 가진 주인공 여자아이가 남몰래 자기 자신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스페인어의 관사 격인 El 을 붙이고 귀머거리를 뜻하는 Deaf 에다가 의미는 없지만 폼나보이는 O 를 붙여서 El Deafo 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씨씨 벨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바와 같이, 정상 청각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만 네 살무렵 뇌수막염에 걸려서 심하게 앓은 후에 청각을 상실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보통의 보청기보다 감도가 뛰어난, 그러나 제법 거추장스러웠을 특수 보청기를 끼고, 선생님의 목에 마이크를 걸게 해서 학교 수업을 받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으나, 주인공은 친구들이 자신의 청각장애를 눈치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전교생 중에 청각장애를 가진 유일한 사람으로 지내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워서 단 한 번도 자신의입으로 “나는 청각장애가 있어” 라고 말한 적이 없고, 멜빵 바지로 덮어서 보청기의 본체를 가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선생님들은 씨씨를 위해서 마이크를 목에 걸어주었고, 귀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보청기의 줄은 어느 누가 봐도 이 아이는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밖에 없었을게다.
씨씨 벨은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세일럼 이라는 도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지역 작가인데, 대학교는 어디를 졸업했는지는 모르지만 미술을 전공해서 엘 데포 를 쓰기 전부터 아기자기한 삽화가 돋보이는 아동 도서를 써왔다.
그런데 어느날 동네 그로서리 상점에 (그것도 바로 우리 동네에 있는 그 상점!) 갔다가 자기 말을 잘 못알아듣는다며 무례하게 구는 점원과 대판 싸우고 난 후에 비로소 “나는 청각장애가 있다구!” 라고 온 세상에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5년 여의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귀여운 그림을 곁들여 아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키득키득 웃으며 볼만한 재미있는 만화책이지, 고난와 역경을 딛고 우뚝 서서 아동문학의 노벨상을 받은 입지전적 인물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래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저자의 강연도 즐겁게 경청했다.
(사실은 강연을 듣는 동안에 너무나 즐겁고 유쾌해서 강연 직후에 바로 로비에 나가서 이 책을 구입해서 읽은 것이다.)
책을 사서 다시 강연장으로 들어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저자의 싸인을 받기도 했다.
즐겁고 유쾌한 강연 내용은, 장애인 비장애인, 혹은 정상 비정상을 굳이 구분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만 어린 소녀 씨씨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누구와 어울렸는지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심지어 ‘나도 청각장애가 있어서 보청기를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연의 말미에는 청중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학생 한 명이 (사실은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 미래의 작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씨씨 벨의 대답이 참으로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네 머릿 속에 근사한 아이디어가 생각났을 때,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라고 첫 마디를 시작했을 때, 나는, 누군가가 나의 대단한 아이디어를 도용할까봐 조심하라는 뜻인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
“누군가에게 너의 그 근사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상대방의 ‘어, 뭐, 그러네’ 하고 시덥잖은 반응을 보이는 순간, 네 머릿속의 그 근사하고 대단한 아이디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야”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혼자 꼭꼭 숨기고 계속해서 생각해나가야 해!”
“그래야 그 대단한 아이디어가 대단한 글로 이어져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거든.”
이 얼마나 창의성을 독려하고 개개인의 다름을 존중하는 조언인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 강연에 참석하도록 권해서인지 낯익은 학생들이 많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학생들이 씨씨 벨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하나 던졌다.
“당신의 책 엘 데포 가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나라 몇 개 국에서 몇 가지의 언어로 출판되었는지 아시나요?”
하고 물으니, 씨씨 벨이 말하기를, 자기도 깜빡 잊고 산다면서, 엘 데포 가 뉴버리 상을 받고 유명해져서 세계 각국에서 출판되었는데, 대략 독일, 스웨덴, 한국, 중국, 이탤리, 프랑스, 호주… 하고 나열하면서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만큼 널리 알려진 것을 말해 주었다.
나중에 이 강연을 주최한 동료 교수가 작가의 체면을 살려주는 폼나는 질문을 해주어서 무척 고마웠다고 말했다 🙂
2018년 4월 12일
아이코 아까버라 ㅠㅠ 책 받자마자 ‘앗 이거슨!’ 을 외쳤거든요. 제가 요즘 장기 프로젝트로 그림책/동화책 번역 출판을 생각하고 있어서 좋은 책을 발견하면 바로 번역 여부를 확인하고 있어요. 책 뒷표지의 소개글을 보고 ‘앗 이거 빨리 확인해야겠다!’하고 컴터를 켠 다음 일단 ‘잘 받았습니다’ 인사부터 하려고 들른 건데……번역본이 나와 있군용….ㅋㅋ
뭐 좋은 책이 이미 번역되어 잘 읽히고 있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죠 ^^
꼭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언젠간 저’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어릴 적 꿈이 번역가였던지라 ㅎㅎ 아직도 한켠에는 번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해요 ^^
작가의 친필 싸인이 담긴 책, 저희 집 꼬마 Kai가 보자마자 ‘자기 것’이라며 붙잡고 안 놔 줍니다 ㅋㅋㅋ 조금씩 같이 읽으려구요. 책 받자마자 ch.3까지 읽었네요 ^^ 좋은 책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뉴버리 혹은 칼데콧 상을 받은 책은 아마도 발빠르게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을겁니다.
그 우수성을 인증받은 책이니 마케팅도 잘 되고 선호하는 독자가 많겠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어로 쓴 책이라 한국어로 번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아무리 잘 번역해도 원래 책이 담고 있던 정서를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엘 데포 역시 어느 블로거가 처음 몇 페이지를 스캔해서 올린 것을 보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무언가 이상하게… 그런 어색함이 있더군요.
이슬님이 노력해서 최대한 그런 어색함을 남기지 않고 잘 번역해주시면 좋겠어요 🙂
미국 땅은 넓고, 번역할만한 좋은 책은 많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