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3

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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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양은 아기였을 때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무척 강했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저학년을 다니는 동안에 그 고집으로 인해 내가 학교에 불려간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 괴로운 기억을 여기에 쓰려는 것은 아니다. 오늘부로 만 열 살이 된 둘리양은 아직도 엄마인 나를 힘들게 하거나 선생님들을 당황시키는 일을 가끔 만들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참 많이 성장했다.

지난 주 수요일 오후, 둘리양의 담임 선생님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둘리양이 영재교육 수업 시간 중에 창피한 일이 생겼는데 (프로젝트를 거의 손만 댄 수준으로 남겨두었는데 선생님이 하필이면 둘리양의 프로젝트를 꺼내서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 순간에 선생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도망쳐서 자기 교실로 돌아왔고, 그 다음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교실에서 남은 일과를 마쳤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둘리양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봐도 단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은 담임 선생님과 영재교육 선생님께 사과의 말을 이메일로 쓰고, 다음에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다. 다행히도 두 분의 선생님은 나와 둘리양에게 평소에 호의적인 사람들이어서 학교 상담 교사까지 함께 만나서 의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라든가, “너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니?” 하고 말을 꺼냈다가는 귀청을 찢을 듯한 둘리양의 고함소리 외에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ㅠ.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늘 하던대로 오늘 하루 어땠냐고 티타임 시간에 물어보았다. 늘 그러하듯, 둘리양은 아침에 스쿨버스를 탈 때부터 하교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까지의 모든 일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영재교육 시간에 있었던 일만 빼고… 영재반에서 요즘은 무슨 프로젝트를 하는지 물어보니 아주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이번에는 “너의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잉…”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갔다가는 둘리양의 심기를 거슬리게 될 것 같아서 – 게다가 그날 나는 저녁 수업이 있어서 티타임을 할 때 이미 매우 늦은 밤시간이었다 – 그쯤 하고 마쳤다.

다음날은 영재교육 수업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무일 없다는 듯 등교를 했고, 나중에 담임 선생님께 여쭤보니 학교에서도 아무일 없이 잘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금요일 아트 레슨에서 둘리양이 아주 멋진 카드 두 개를 완성했고, 이걸 어디에 사용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과 영재반 선생님께 사과하는 말을 써서 드리자고 했더니 “잉…” 하는 반응을 보였다. 주말 동안에는 친구 생일파티에 하루 다녀오고, 자기 생일 파티를 1박 2일에 걸쳐서 하느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월요일 늦은 아침, 슬립오버 했던 친구들도 다 돌아가고, 휴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 둘리양을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다” 라는 속담을 설명해주었다. 인터넷으로 호미와 가래의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영어 속담에도 비슷한 말이 있었다. One stitch in time saves nine 제 때 하면 한 땀이면 될 바느질을, 때를 놓치면 아홉 땀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선생님께 사과하는 글을 쓰는 것이 무척 하기 싫은 일이지만, 오늘 카드를 써서 내일 선생님께 드리면 선생님들은 틀림없이 읽고 사과를 받아들이고, 너를 좋은 학생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일이 하기 싫어서 미루기만 한다면 내일 당장 영재반 수업에 들어가기가 껄끄러울 것이고 (영재반 수업은 월화수요일에만 있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너의 행동에 대한 의문과 감정이 풀리지 않은채 너를 대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 가서야 선생님에게 다시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다면 그 때는 카드 한 장 쓰는 일로는 안될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 오늘 호미질 몇 번 하는 마음가짐으로 사과 카드를 쓰자… 하고 열심히 설명하고 설득했다. 얼굴 가득 괴로운 표정으로 아무말 없이 앉아 있는 둘리양에게, 엄마는 곧 수업이 있어서 학교로 출근해야 하고, 점심 시간이 다가와서 배가 고프다는 하소연도 했다. 마침내 둘리양이 제안을 했다. 일단 점심밥부터 먹고 자기 방에 가서 혼자 카드를 쓰겠다고…

다음날인 어제 화요일에 자기가 쓴 카드를 들고 등교했다. 하교하는 버스에서 둘리양을 데리고 오는 길에 선생님들께 카드를 드렸냐고 했더니 그랬단다. 선생님이 무슨 말이 없더냐, 예를 들면 네가 직접 만든 카드가 예쁘다든지, 사과 카드를 써주어서 기쁘다든지…? 하고 물으니, 둘리양이 하는 말이… ㅎㅎㅎ 하교 직전에 선생님께 카드를 드렸기 때문에 그런 말을 주고 받을 새가 없었단다. 자기 딴에는 그런 식으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나보다.

딸기맛 케익은 믹스 가루로 구웠고 빨간색 아이싱도 시판 제품을 구입한 것이지만 내 솜씨로 장식한 것 🙂

그리고 오늘 아침, 수요일은 둘리양의 생일이다. 어젯밤에 학교에 가지고가서 나눠먹을 컵케익을 구워달라고 해서 열심히 예쁘게 구워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 되니 둘리양의 마음이 바뀌었나보다. 보통은 아침 8시쯤 되면 등교 준비를 다 마치고 아랫층으로 내려오는데, 만약에 8시 20분이 넘어도 내려오지 않으면 그 날은 둘리양이 아프거나 심기가 불편해서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다. 오늘 아침에도 8시 30분이 다 되어가도록 둘리양은 아랫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내 짐작으로는, 어제 막판에 드린 카드를 읽어보신 선생님을 다시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아프거나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면 방문을 잠근채 방 안에서 엄마가 부르고 묻는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열쇠로 문을 따고 억지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억지로 옷을 갈아입히거나 등을 떠밀어서 등교를 시킬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하염없이 방문 앞에서 간간이 둘리양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려오곤 한다. 아파서 학교를 못가는 날에도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혼자 끙끙대며 이겨내는 아이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둘리양이 스스로 몸상태나 기분이 좋아져서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오늘 아침에도 하염없이 방문 앞에 앉아서 간간이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면 엄마한테 그렇다고 말을 해주어야 학교에 결석한다는 통보를 늦지 않게 할 수 있어”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간간이 “일단 방문만 좀 열고 나와봐” 하고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열 살이 되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최근 며칠간 엄마가 진심으로 자신을 돕고자 노력한 것을 깨달아서인지, 잠긴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큰 진보인가!! 그녀가 문을 스스로 열었다!!

이제 거의 나만큼 키가 큰 둘리양을 무릎에 안고 문을 열고 나와주어서 고맙다고 한없이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내 입장을 혼잣말 하듯이 주절주절 했다. 대략 나열해보자면…

  1. 이렇게 날씨가 흐린 날에는 엄마도 일하러 나가기가 싫어진다. 그러니 네가 오늘 학교에 안가고싶은 생각을 가지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다.
  2. 그런데 오늘은 학교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왜냐하면, 어제 네 카드를 읽은 선생님들이 너를 좋게 맞이해줄 것이고, 네가 들고갈 컵케익을 본 친구들도 기뻐할 것이니까.
  3. 엄마는 오늘 아침에 연달아 회의 두 개에 참석해야 하고, 저녁 수업을 가르쳐야 한다. 그 중간에 짬이 나는대로 금요일 수업 준비도 해야 한다. 너도 알다시피, 금요일 수업 두 개 중에 하나는 처음 가르치는 과목이어서 준비할 것이 많다. 심지어 이번 금요일에는 나머지 한과목 준비도 해야할 것이 많아서 엄마의 마음이 분주하고 불안(anxious)하다.
  4. 이런 날에는 모든 일이 원래 스케줄대로 착착 진행되어야 수업 준비를 비롯해서 하는 일마다 효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둘리양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원래 계획과 달리, 밥도 차려주어야 하고, 엄마를 부를 때마다 대답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니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봐 더욱 걱정이다.
  5. 네가 학교에 간다면 엄마는 열심히 일해서 저녁 무렵에는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러면 학교에서 돌아온 너에게 맛있는 저녁밥도 해주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게 된다.
  6. 이미 지금 현재 정상 등교를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지만, 네가 가겠다고만 하면 엄마가 학교에 전화해서 엄마 핑계를 대고 네가 지각하는 것을 전혀 챙피하지 않은 일로 만들어주겠다. 즉, 오늘이 둘리양의 생일이라 컵케익을 굽다가 등교 준비가 늦어졌다 –> 엄마의 잘못이지 둘리양의 잘못이 아님.
  7. 어차피 아침에 30분쯤 지각하는 것은 별 일이 아니다.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8. 오늘 학교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생일 축하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등교하기 좋은 날이냐. 그러다보면 흐린 날씨처럼 찌푸린 기분도 금새 좋아질 것이다.
  9. 영재반 선생님도, 4학년 담임 선생님도, 어제 네가 드린 카드를 읽은 후에 너에게 고맙다거나 잘했다는 등의 칭찬을 해주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네 기분을 좋게 만들 것이다.
  10. 학교에 가서 행복해 하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엄마도 기운이 나서 흐린 날씨쯤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 품에 안겨서 듣고만 있던 둘리양이 마침내 등교를 하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이런저런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이 혼자 준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공연히 잔소리를 하다가는 다시 기분을 잡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아랫층에 내려와서 컵케익 상자를 꺼내놓고 둘리양의 등교 준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학교로 데려다 주었다. 정상 등교가 아닌 때에는 부모가 학교 안으로 함께 들어가서 지각을 하게된 사유와 등교한 시간을 기록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학교 건물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런 절차를 하는 동안에 생일을 맞은 둘리양에게 연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컵케익이 맛있어 보인다는 말도 들었다. 행정 절차는 밟았지만, 담임 선생님에게는 따로 문지 메세지를 써서 오늘 아침에 둘리양 생일이라 아침 등교 준비가 조금 늦어졌다, 컵케익은 반 아이들과 선생님과 함께 나누어 드시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학교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생일 기념 사진 한 방! 둘리양이 찌푸린 건 햇빛 때문이었고 이 때부터 이미 기분은 좋아진 상태였다.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하자면 우째 이런 애가 있나… 하고 한탄을 수없이 할 일이지만, 그런 어리석은 비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전혀 실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저 두자릿수 나이를 먹더니 이렇게나 자랐다는 점을 기뻐하고 축하하기로 했다. 제 손으로 방문을 열고 나오고, 엄마의 말을 듣고 자신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그 빅 걸이 바로 우리집 둘리양이다!

어제부터 쓰다가 오늘 아침에 글을 완성했다. 2022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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