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가르치는 과목 중에서 [유아특수교육의 의학 및 뇌신경학적 측면] 이라는 어려워보이는 과목이 있다.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대부분 의학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다, 그 중에서도 만 5세 이하의 유아들은 더더욱 의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효과적인 특수교육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버지니아 주 유아특수교육 교사자격증을 받으려면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과목이다. 원래는 유아특수교육 전공 학생들만 수강하는 과목인데, 언어치료 전공 학생 한 명이 이 과목을 꼭 수강하고 싶다고 내게 이메일로 정중하게 부탁을 해서 수강을 허락한 것은 지난 봄 학기 중반이었다.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정중하게 쓴 이메일로부터 이 학생은 열심히 노력하는 우수한 학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학생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두 명 중의 한 명이다 🙂

한 학기의 첫 수업이니만큼 전반적인 과목에 대한 안내를 했는데, 강의안에 가득 적힌 내용을 그대로 줄줄이 읽기만 하면 지루하니, 재미난 사진을 곁들여서 파워포인트로 만들었다. “너희들 굿 닥터 라는 드라마 본 적 있어? 그게 원작은 한국 드라마인데, 어쩌구 저쩌구…” 하고 드라마 이야기를 시작하면 목요일 저녁 시간에 시작하는 강의이지만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을 하게 되어 있다 ㅎㅎㅎ
“우리들은 굿 닥터가 될 것은 아니지만, 굿 유아특수교육 (Early Childhood Special Education, 줄여서 ECSE 라고 함) 티쳐가 되려는 사람들이야. 그러려면 이 모든 의학적 관점과 뇌신경학적 관점을 잘 이해해야 하지.” 라고 말하면 누구라도 이 과목의 내용과 목적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슬라이드에서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 하고 물어보며 의학용어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아트’ 나 ‘에코’ 같은 말은 물론 미술이나 메아리라는 뜻이 아니다. 베개보다 두꺼운 교과서를 펼치면 이런 용어가 빽빽하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찾아 쓰게 하는 단어장 만들기 숙제를 거의 매주 해야 한다.
이렇게 대략적인 강의 내용과 과제물과 시험, 채점, 등의 주요 정보를 소개하고, 다음은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다. 이번 학기부터 본격적인 전공 과목을 수강하게 되는 3학년 학생들은 자기 전공의 같은 학년 동급생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고 앞으로 졸업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함께 같은 수업을 듣게 되니,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친해지는 것도 강의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이번 학기 학생 중에 한 명은 우리 전공이 아니라 언어치료 전공 학생이다. 그런데 이 학생의 스토리가 아주 흥미롭다.

개강 직전에 학교 장애학생 지원 본부에서 이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이 수업 시간에 “미미”라는 이름의 서비스 개가 학생과 함께 출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미미를 데리고 오는 학생에게 필요한 지원 사항에 관한 이메일도 받았는데, 보통은 한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 내용인데, 이 학생은 원활하게 수업을 받기 위해서 내가 지원해야 할 사항이 서너페이지 가득 적혀있었다. 보통은 주의집중력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에게 시험 시간을 더 길게 주라거나, 청각 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해 수업 시간에 보여주는 모든 비디오에 자막을 켜주라는 등의 사항이 일반적인데, 이 학생은 교실 문을 완전히 닫지 말고 살짝 열어두라거나, 강의실 앞자리에 앉도록 해달라거나, 뭐 하여간 무척 지원 요청 사항이 많았다. 그리고 개강 하는 날 이 학생이 미미를 데리고 휠체어를 타고 출석하는 것을 보니 그 모든 사항이 다 이해가 되었다. 뇌성마비 증상 때문에 이동에 어려움이 많으니 휠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교실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노트 필기가 원활하지 못하니 (뇌성마비는 온몸의 근육이 힘없이 늘어지거나 반대로 아주 심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이 주요 증상이다) 컴퓨터 사용을 허락하고 필기할 시간을 넉넉하게 주어야 한다. 그냥 지원 요청 이메일에 뇌성마비 환자 라고 한 마디로 적었다면 이해가 더 빠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선입견이나 섣부른 단정을 할 위험이 있으니 해당 학생의 장애명은 절대 말하지 않고, 대신에 그 학생에게 필요한 지원 사항만을 그리 길게 써놓았던 것이다.
앞서 쓴대로 이 학생은 우리 전공이 아닌 다른 과 학생인데, 내 수업이 자기 전공에 도움이 될 것 같고 흥미로와보여서 꼭 수강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이메일을 내게 보냈다. 가끔은 수강 학점을 채워야 하는데 내 수업이 자기 스케줄에 잘 맞아서 과목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없이 그저 수업을 듣게 해달라는 학생들이 있어서, 나는 다소 깐깐한 태도를 유지하며 이 과목은 이러저러한 것을 배우고 비전공자인 자네가 들으려면 이런저런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또 이런 저런 어려움을 감소해야 할 것이다, 하고 자세한 안내를 먼저 해준다. 그런데 이 학생은 그 모든 어려움을 다 감수하고도 이 수업이 꼭 배우고 싶은 내용이라고 했다. 그 때는 장애가 있는지 서비스 개를 데리고 다니는지 하는 것은 전혀 몰랐고, 다만 배움에 대한 의욕이 무척 크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수업 첫 날에 벌써 친구를 사귀어서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 직접 체험한 특수교육을 바탕으로 상당한 사전 지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혹시 뇌성마비 단원에서 특강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니, 아주 흔쾌히, 오히려 고마워하면서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번 학기 뇌성마비 단원은 아주 좋은 강의가 될 것 같다. 이 친구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쌍둥이 자매는 건강하고, 자신은 출산 당시 어려움이 있어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도 뇌성마비가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인데다 심지어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점도 같다고 한다. 대단한 우연이다. 데리고 다니는 개 미미도 주인 못지않게 성격이 좋아서 세 시간 수업 내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바닥에 엎드려 줄곧 잠을 잤고, 수업이 끝나자 주인의 휠체어를 잘 따라다니며 길 안내를 했다. 갈색 골든 리트리버 종인데 참 귀엽게 생겼다.

다음 학생의 이야기는 더욱 멋진 스토리여서 기록해두려 한다. 이 학생은 우리 나라의 전문대와 비슷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전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우리 학교 우리 전공에 3학년으로 편입을 해서 이번에 첫 수업을 듣게 된 상황이다. 자기 소개를 할 차례가 되었는데 유창한 영어 뒤에 약간의 액센트가 느껴졌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은 남미에 있는 나라 콜롬비아에서 유학을 왔다고 했다. 미국 유학은 어떤 계기로 왔으며 우리 학교에 편입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그 대답이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처음에는 영어를 배우려고 어학 연수 프로그램을 일 년간 다닐 계획으로 미국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몬드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학 연수를 받으면서 용돈도 벌고 월세도 절약할 수 있는 방책으로 입주 베이비시터 일을 시작했는데, 그 가정에서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아이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베이비시터를 찾던 터에 이 학생이 아주 안성마춤으로 고용이 된 것이다. 원래 계획했던 일 년이 지나고 콜롬비아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이의 부모가 이렇게 마음에 드는 베이비시터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으로, 등록금을 내줄테니 미국 전문대에서 공부를 시작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는 이 학생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대단한 기회가 되었고, 동시에 그 부모에게도 유능한 베이비시터를 최소한 2년 이상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월급을 올려준다고 했으면 돈이 덜 필요해졌을 때 언제라도 일을 그만둘 수 있지만,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최소한 한 학기, 한 학년, 또는 졸업을 할 때 까지 장기간 이 집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미국의 대학 등록금은 무지무지 비싸지만 커뮤니티 칼리지의 등록금은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가능한 제안이었을 것 같다.
전문대에서 유아교육을 공부하면서 베이비시터 일도 계속하고 그러다가 미국인 남자친구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친구는 로아녹에 있는 대형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학교에 편입하게 되면서 리치몬드를 떠나 로아녹으로 이사와서 남자 친구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과에서 올해 새로 시작하는 이 편입 프로그램은 전문대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2년간 등록금과 책값 등의 비용이 장학금으로 지급되어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니까 이 학생은 꿩먹고 알먹기 식의 미국 유학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2년 동안 무난하게 공부를 마치면 버지니아 주정부가 인정하는 공립 학교 교사 자격증을 따게 되니 안정된 직장도 금새 구할 것이고, 남자친구와 결혼을 한다면 더욱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학생,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유아특수교육 교사가 되는 것은 일차 목표이고, 그 다음에는 Child Life Specialist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이 직업은 아동 전문 병원에서 일하는 직종인데 장기간 입원해서 치료를 받느라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 환자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일이다. 그 직업에 관한 정보를 찾아서 수첩에 꼼꼼히 적어놓은 것을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이 학생이 아마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남의 집 아이를 돌보는 일은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또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이 학생은 사소하다고 여길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에 아이의 부모가 대학 등록금을 내주면서까지 계속 고용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사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만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믿을만하고 유능한 베이비시터를 지속적으로 데리고 있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사는 학생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놓치고 싶지 않았을지 짐작이 된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태도에 더해서,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덥썩 붙잡은 점도 높이 평가한다. 등록금을 내줄테니 대학 공부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겁많고 소심한 사람이라면 한 번 생각해보겠다 라거나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언감생심 대학 공부를 어찌 하겠느냐며 손사래를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감하고 씩씩한 이 학생은 아마도 20여년 전에 내가 강의 조교 기회를 덥썩 물었던 그 심정으로 인생을 바꿀 그 기회를 낚아챘을 것 같다. 이판사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잃을 것이라곤 실패했을 때 자존심 뿐이니, 한 번 도전해보자! 하는 그 마음가짐이 대견하고 반갑고 좋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학생의 인생역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조언했다. 기회가 왔을 때는 그걸 꼭 잡으라고.
2022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