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에는 버진 아일랜드 제도 (여러 개의 섬이 모여있음)가 있는데, 그 중에서 동쪽은 영국 영토이고 서쪽은 미국 영토이다. 이번 크루즈 여행은 카리브해의 동쪽인 버진 아일랜드를 돌아보는 여정이었는데, 전날 갔던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토르톨라 섬은 너무 작고 너무 조용해서 볼거리가 없었던 반면,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세인트 토마스 섬은 구경할 곳도 제법 많고, 미국 영토라서 오랜만에 셀폰을 켜고 이메일 확인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항해 중에는 자칫 실수로 외국 로밍 서비스에 연결되지 않도록 (엄청난 요금이 부과된다) 비행기 모드로 해두어서 인터넷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배에서 내린 다음 트롤리를 타고 세인트 토마스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 중에서 세인트 토마스 섬을 방문했고, 그 섬의 항구 이름은 샬롯 아말리에 항이다. 바닷가라고 해서 아무 곳에나 배를 정박할 수는 없다. 해운대 같은 백사장을 끼고 있는 바닷가는 사람들이 수영을 하기에는 좋지만, 수심이 얕아서 큰 배가 들어올 수는 없다. 부산항이나 이탈리아의 나폴리 항구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이상적인 항구의 지리적 조건을 알 수 있다. 육지로 솟아오른 곳이 높은 언덕이라면, 바닷물 속 지형도 비슷한 각도로 깊게 파여있어서 큰 배가 바닥에 걸리는 것없이 육지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 그러고보니 씨애틀 여행을 갔을 때에도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 인상적이었다.

세인트 토마스 섬을 트롤리를 타고 드라이브하는데, 30여년 전까지 살았던 내 고향 부산의 산복도로가 떠올랐다. 원래 부산은 지형적으로 큰 도시가 되기 힘든 곳인데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가 되고 피난민으로 급작스럽게 인구가 늘어나서 산꼭대기에도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마련하신 첫 집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 지역이었는데, 병원이나 시장 등 도심으로 볼일이 있어서 가려면 산복도로를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내려가야 했다. 낮에는 부산 앞바다가 시원하게 보이고, 밤에는 언덕배기 주택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땅에 내려온 별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덜컹거리는 버스 드라이브는 언제나 즐거웠다.
부산의 산복도로와 세인트 토마스 섬의 도로는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부산 동구 좌천동 산꼭대기에는 작은 주택이 즐비하고, 해수면과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면, 즉 초량, 남포동, 광복동 등의 지역에는 고층 빌딩이 서있다. 반면에 세인트 토마스 섬 꼭대기에는 세계적인 부자들이 별장으로 소유한 듯한 저택이 자리잡고 있지만 항구에 가까운 곳으로 내려갈수록 작고 낡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듯한 집이 줄지어 있었다. 높은 곳과 낮은 곳에 부자와 가난한 이가 서로 떨어져서 서식한다는 점은 결국 똑같다 🙂

트롤리 드라이브가 끝나는 곳은 해적 난파선 박물관이었다. 카리브해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해적의 소굴이었는데, 신대륙과 유럽을 오가는 배를 탈취해서 금은보화를 빼앗고, 수많은 작은 섬들 중 하나에 숨어버리면 제아무리 영국이나 스페인 해군이라도 해적을 잡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허리케인을 만나 해적선이 침몰하기도 했는데, 난파선을 탐색하다보면 값진 물건을 줍기도 하고 역사적 자료를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해적의 역사적 배경과 생활상 등을 잘 설명해주고, 탐사 로봇을 조작할 수 있다거나, 허리케인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활동이 준비되어 있었다.
해적들은 바다의 도적인데, 도둑놈들은 무법천지로 살 것 같지만 배 안에서 무질서하게 지내다가는 서로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니 도둑놈들 주제에 자기들끼리 법률을 정해서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법을 어기는 해적은 선장의 명령으로 사형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해적선 선장이 영화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큰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맞나보다.

유럽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해적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우리 나라의 어린이들이 나뭇꾼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산악지대인 한반도의 어린이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는 나뭇꾼이나 산에 사는 호랑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영국과 스페인과 기타 신대륙에서 식민지를 찾아가는 나라의 어린이들은 머나먼 바다에서 큰 배를 타고 여러 가지 모험을 겪는 해적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아이 아이 캡틴” (예이~ 선장님!) 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쓰기도 하고, 디즈니 크루즈에서는 해적의 밤 행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선장님이었더래서 그런지 해적 이야기가 더욱 재미있게 다가왔다.

동쪽 카리브해를 돌아보는 이번 크루즈 일정은 플로리다를 떠나 이틀 동안 내려와서 하루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토르톨라 섬), 그 다음날은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 (세인트 토마스 섬)에 기항하고, 다시 꼬박 하루를 올라와서 바하마에 있는 디즈니 섬 (캐스트 어웨이 키)에 하루를 머물고 플로리다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서쪽 카리브해 일정에 비하면 배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고, 기항지도 조용한 편이어서 비용이 적게 들고 휴양하는 느낌이 드는 여행이었다. 6월의 카리브해는 덥고 습했지만, 7-8월에 비하면 아직은 덜 더웠고 마침 날씨도 구름이 많아서 피부가 덜 상했다.


배가 항구를 떠나는 시간은 무척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서 만약에 기항지 관광을 즐기다가 배를 놓치면 크루즈사에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크루즈 배를 놓치지 않으려고 항구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많이 있다. 보는 사람은 재미있겠지만, 당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큰 일이다. 모든 짐은 크루즈 배 안에 있는데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배를 보면서 망연자실 하고 있다가, 다음 기항지로 무슨 수를 쓰든 찾아가서 크루즈를 다시 타야 한다. 코난군과 나는 혹시라도 우리 배에 그런 사람이 생기지나 않을까 싶어서 배가 항구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023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