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피해 연안의, 불의 나라라는 별명을 가진 아제르바이잔은 우리 학교 수학과 교수인 아기다를 알기 전까지는 외계행성이나 다름없이 여겨지던 나라였다. 양질의 어린이집을 래드포드에 설립하자는 뜻으로 우리 학교 교수 여러명이 태스크포스 팀을 만들었는데 그 때 부터 아기다와 친분을 쌓게 되고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손이 크고 일을 아주 많이 잘 하는 아기다는 매월 어린이집 운영위원회 회의를 자기 집에서 개최하곤 했는데 그 때 마다 커다란 식탁이 가득 차도록 음식을 준비했다. 지금은 어린이집이 설립되고 운영이 잘 되고 있어서 회의때 마다 주문해서 먹는 음식값 정도는 위원회 예산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아기다가 차려주던 아제르바이잔 음식이 훨씬 더 맛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ㅎㅎㅎ
아이들이 어릴 때는 따로 만나 친분을 더욱 다지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여유로운 시간이 생겨서 지난 겨울에는 아기다의 가족들을 우리집으로 초대했고, 이번 춘분 명절에는 우리가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코난군은 버지니아비치 에서 테니스 대회가 있어서 남편과 네 시간 넘게 먼 도시로 가고, 둘리양과 나만 파티에 참석했다.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춘분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설날과 비슷한 의미로 축하하는 명절인데 노브루즈 라고 부른다. 노브루즈는 새봄이 시작되는 날이고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와도 겹치니 크게 축하할만한 명절인 것 같다.
나라의 이름인 아제르바이잔이 곧 불의 땅 이라는 뜻이니, 최대 명절 축하에도 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탁 위에는 식구 수만큼 초를 켜고 견과류와 캔디와 계란으로 장식해두는데, 촛불이 다 타서 저절로 꺼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이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야외에서는 큰 모닥불을 지펴놓고 그 위를 점프해서 세 번 통과하는 의식이 있는데, 첫 점프는 건강, 두번 째 점프는 재산, 세번 째 점프는 각자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한다. 불을 뛰어 넘는 순간이 지난 해의 모든 악운이 타버려서 새해에는 좋은 일만 올거라는 의미이다. 모닥불이 제법 커서 훌쩍 뛰어넘기가 아주 쉬운 것은 아닌데, 노인이나 어린이는 옆에서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불의 가장자리를 살짝 뛰어넘는 시늉만 하기도 한다.
파티날에 아기다는 네 시간 거리의 워싱턴 디씨에서 회의가 있어서 참석했다가 돌아오느라 손님들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귀가했다. 음식 준비는 아기다가 미리 해놓기도 했고, 이제 대학생이 된 큰 딸과 아기다의 남편이 차려내었다. 가까이 살고 계신 아기다의 부모님도 파티 준비를 도우셨다.
아무리 가족들이 돕는다해도,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수십 명을 초대하는 파티를 집에서 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 잘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기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네 시간을 운전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고 전통 춤을 보여주고, 아제르바이잔의 명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래위층을 다니며 손님들이 잘 먹고 있는지 확인하고 다정한 인사를 건내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노부르즈 음식에는 견과류를 많이 사용하는데, 겨울 동안에 싱싱한 햇과일을 먹을 수 없어서 말려서 보관하던 것을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의 싹을 내어서 장식을 하는 것은 이제 곧 그 밀싹을 심어서 농사를 시작할거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음식은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한 것이 많았는데, 사프란 꽃을 넣어서 색과 향을 더한 쌀밥이나, 쇠고기와 채소를 넣고 뭉근하게 익힌 요리, 심지어 오이냉국과 흡사한 요리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한가득 준비한 아기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
아기다는 밥만 잘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 분야에서 연구활동도 아주 열심히 하고 강의도 잘 해서 버지니아주 전체에서 해마다 한 명씩만 주는 우수한 대학교수 상을 받기도 했다. 그 상이 영예롭기도 하지만, 부상으로 교내 가장 편리한 위치의 주차장 자리를 지정해주는데, 그게 제일 부럽다. 언제 어느 시간에 출근해도 주차자리를 찾아 빙빙 돌아다닐 필요없이 내 자리가 확보되어 있고 연구실과 가장 가까운 위치이니 얼마나 편리할까 싶다.
아기다와 정말 똑같이 생긴 아기다의 어머니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의사였는데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의사였다고 한다. 아기다의 큰딸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의대에 진학하려고 의예과 전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기다에게 ‘그럼 너는 왜 의사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대답이 재미있다. 아기다는 피를 보거나 남의 상처와 아픈 곳을 들여다보는일이 내키지 않아서 대학 전공으로 의학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는 아제르바이잔이 구소련의 한 지역이어서 공산주의 체제였는데, 그래서 의사나 청소부가 받는 월급이 똑같았다고 한다 (누구나 똑같은 대접을 받는 평등한 사회…). 그러니 굳이 힘들고 내키지 않는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 유학와서 정착하고 살아보니, 수학 교수와 의사의 월급 차이는 엄청나서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한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아기다의 둘째 딸은 둘리양보다 한 살이 많은데,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 손님들과 함께 어울려 자기들끼리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순하고 예쁜 강아지도 함께 놀았다.
파티의 마지막 이벤트로 불을 뛰어 넘는 행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점프에서는 균형을 잃고 착지가 흔들렸지만 온몸에 불향이 스며들 정도로 불가에서 지난 해의 액운을 다 태워버렸으니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 🙂
2024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