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설교하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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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에서 퍼온 글.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삼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옛말 중에 틀린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다. 베스트셀러였던 “마시멜로 이야기”도 결국은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말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나는 ‘자고로 사람은~~’ ‘자고로 삶이란~~’으로 시작되는 ‘옛말’을 무척 싫어했고,
심지어 증오하기도 했다. 좋은 뜻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애써 무시하거나, 반대로 엇나가려고 했다. 그런 말들을 들었던 방식과
타이밍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방안에서 빈둥거리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난 다음에 들었거나, 수업시간 중에 졸다가 교사에게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뒤에 그런 말들을 들었다. “선생만 아니면 확~~”이라며 분노를 삭이기 바쁜 와중에, 그런 말에 감동을 받을 리
있겠는가. 반감만 생기지.

 

친척 할아버지 중에는 이런 분도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를 만나기만 하면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하고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옛말’을 들려주었다. 내가 예뻐서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할아버지의
소일거리였을 뿐이다. 머릿속은 ‘이놈의 얘기 언제 끝나나’ ‘빠져 나갈 방법은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세 시간
얘기를 들었어도 기억나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좋은 말들을 귀담아 듣지 않거나, 일부러 엇나가려 했던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들을 대부분 ‘설교’의 방식으로 들었다. ‘설교’는 상대를 괴롭게 만들 뿐이다.

 

34살에 큰딸아이, 39살에 둘째아들을 낳았다. 30년 넘게 오래 산만큼 아이들보다 내가 조금은 더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 말, 들려주고 싶은 말이 많다. 부모는 아이의 멘토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멘토와 설교꾼의 차이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전달방식일 것이다.

 

느닷없이 아이를 붙잡아 앉혀놓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설교
방식이다. 내게 통하지 않았듯이 아이들에게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떻게 들려주면 효과적일지 고민하며 살고
있다.

 


 

주말에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는 일이 종종 있다. 한두 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를 달린다. 결국 같은 길을
왕복하는 코스를 달리는 셈인데, 일부러 가는 길에 언덕을 올라가는 일이 많은 코스를 택한다. 그러면 갈 때는 힘들고 올 때는 편한
코스가 된다. 가는 길이 힘든 만큼 오는 길에 쌩쌩 달리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을 들려주기 좋은 타이밍이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면 왠지 ‘설교’ 조로
들릴 것 같다. 부모의 말은 아이의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것보다, 옆얼굴에 대고 지나가는 듯이 말하는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그래서 일부러 흘리듯이 말한다.

“야, 역시 힘든 일을 먼저 하면, 나중이 즐겁구나.”

 

“도전 없이 성공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용기를 내서 도전해야만 성공을 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은 언제 들려주어야 효과가 있을까.

 

딸아이는 여섯 살 때 구름다리에 도전했다. 구름다리에 매달리는 것에 성공하면 한 칸 전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 손을 놓아야 한다. 두 손으로 매달려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딸아이가 자기 힘으로 한 칸 전진하는데 일 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
딸아이가 한 칸 전진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가슴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무서웠지?”

“응.”

“뭐가?”

“한 손을 놓는 게 무서웠어.”

“그랬을 거야. 그렇지만 무섭다고 한 손을 놓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지. 앞으로 나가려면 한 손을 놓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란다.”

 

딸아이가 구름다리를 혼자 힘으로 씽씽 나가기 전까지 틈만 나면 비슷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딸아이 가슴속에
“삶이란 구름다리와 같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간식으로 ‘삶은 계란’을 먹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말이 있어 당시 아홉 살인 큰딸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삶이 뭐라고 생각하니?”

“몰라?”

“삶은 …… 계란이야.”

“뭐야? 시시하게?”

“정말이야. 아빠는 정말 삶은 계란이라고 생각해. 껍질을 남이 깨느냐, 내가 깨느냐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로
달라지거든. 남이 껍질을 깨면 계란부침이 되어 남의 밥상에 올라가지. 내가 껍질을 깨고 나와야 생명이 돼. 자기 삶을 살아가려면
자기 힘으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 거지. 그래서 삶은 계란이야.”

 


 

딸아이가 삶은 계란을 먹을 때마다 이 말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좋은 결과가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청소년 시절에 <데미안>을 읽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나는 머리가 나쁜가’
괴로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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