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0

미국대학원에서 박사과정 무사히 마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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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성공신화? 그딴건 개나 줘버려!

부제가 조금 심하게 자극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성공신화” 라는 미사여구로 한껏 꾸며낸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싶지 않다. 내 자신의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아름답게만 만들어내는 것이 싫다.

지금 막 티브이를 켰다고 가정하자.

“빰~ 빠~~밤~~~” 하는 씩씩하고 진취적인 음악이 흐르면서 화면 한가운데 지구본이나 세계지도 같은 것이 흐린 배경으로 깔리고, 화면 아래에서 윗쪽으로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사람들의 사진이 하나씩 박자에 맞추어 힘차게 올라간다. 동시에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도전> <패기> <열정> <성공> 따위의 단어가 굵은 고딕체로 하나씩 흘러가고 있는데, 굵지만 느끼하지 않은 남자 성우의 나래이션이 흐른다.

“맨손으로 시작한 미국유학생에서 미국 최고의 교육학 명문대 박사학위를 거머쥐기까지!”

“수많은 현지인 대학원생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강의전담 조교 자리를 따내고, 각종 상과 장학금을 휩쓸었던 자랑스런 한국인, 소년공원 박사!”

“우수논문상을 받으며 박사졸업을 하기도 전에 버지니아 주립대에 테뉴어트랙 교수로 임용된 그녀의 성공비결!”

한국 방송국에서 <성공시대> 라느니, <글로벌 인재 집중탐구> 라느니 하는 제목을 달고 방송하는 다큐멘터리 포맷을 흉내내어 보았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저런 류의 프로그램이 정말 싫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로봇 장난감이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균형을 맞추어 탁자위에 세운 세살박이 코난군의 손길이 성공이다.

한모금만 삼켜도 속이 화악~ 풀어지게 잘 끓여낸 콩나물국 한 냄비도 성공이다.

일 분의 낭비도 없이 계획한대로 하루 24시간을 살았다면 그것또한 성공이라 부르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즉, 성공이란, 크고 작음이나 중대하고 사소함의 가치를 절대로 부여할 수 없는, 그 자체만으로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위의 예를 든 프로그램에서는 대부분 “인류최초”로 무슨 기술을 개발했거나, “세계최고”의 명문대학인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다든지, 아니면 땡전 한 푼 없던 사람이 뭘 잘 해서 수십 억원을 벌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만을 “성공”이라 부른다. 그 “성공한 사람들”은 애시당초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아니고 떡잎부터 남다른 능력을 보여왔다고 칭송하는데, 그 때문에 나같은 보통 사람 시청자들은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되곤 한다.

나는 박사과정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학위를 받기까지 과정에서 내가 기울인 노력과 고마운 주변의 도움을 소상히 기록해서 읽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고싶은 마음이지, 내 글을 읽고 ‘역시나 나는 안돼’ 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지 않기를 바란다.

글의 서두가 길어져서 어쩌면 한 편의 글에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짓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본론을 시작한다.

앞서 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이야기를 했다. 돌이켜보니 석사과정에서 새로운 이론과 미국에서 유아교육 연구 동향을 소개받은 것도 의미가 크지만, 그보다도 영어로 접하는 전공용어와 미국 대학원 수업방식에 대해 배운 것이 박사과정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에게서 전해듣던 방식과 미국에서 내가 체험한 대학원 강의와 공부의 방식은 많이 달랐다. 하지만 석사과정에서 어느정도 미리 경험을 해보았기에 박사과정을 생소하거나 당혹스런 경험없이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 어느 정도 내 실력과 성실성을 보장하기도 했다. 나는 석사과정을 마친 학교에서 박사과정도 할 요량으로 다른 학교에는 지원조차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불안감과 안전빵으로 몇 군데 학교에 지원을 하고 있었다. 배짱좋게 단 한 군데 박사과정에만 지원을 했는데 합격한 이유 중에 주요한 것이, 교수님들이 이미 나를 잘 알고 계셨고, 내가 영어는 조금 부족해도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라는 인식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니 석사과정에서 들었던 몇 과목의 크레딧을 인정받기도 하고, 지원비용이며 이사비용 같은 것이 전혀 들지 않아서 여러가지로 득을 보았다. 일부 남부사투리가 심한 교수님의 액센트도 이미 익숙해졌고, 석사과정 중에 혹독한 자체어학연수 덕분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줄어든 상태였다.

허나, 머니머니해도 머니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석사 두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쓰고나니 이미 한국에서 들고온 통장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세번째와 마지막 학기에는 외국인에게 적용되는 액수가 아닌, 조지아주 거주자 등록금 액수만큼만 낼 수 있도록 교수님들이 도와주셨다. 그래도 중고차를 살 때와 약간의 부족한 생활비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는데, 나이 서른에 부모님께 용돈을 드려야 할 처지에 손을 벌리고 도움을 받는 것이 죄송스럽기 그지 없었다.

시작은 운이 좋아서 나를 포함한 그 해 박사과정 입학생 모두가 연구조교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편의상 조교 “장학금” 이라고 부르지만 아무런 댓가없이 받는 스칼러쉽이 아니고, 조교로 일하는 댓가로 등록금을 면제받고 다달이 월급을 받는 조교 “월급” 이라고 불러야 맞는 표현이다.)

 조지아 대학교가 교육학 분야에서 미국내 랭킹이 매우 높고 그래서 교수님들이 따온 연구기금이 많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오래도록 내 편이 되어주질 못했다. 911 사건 때문이었는지 계속되던 중동전쟁 때문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암튼 학과내 경제사정이 나빠져서 연구조교를 모두 없애고 강의를 하는 티칭조교만 등록금과 월급을 주기로 했다는 결정이 입학한 그 다음 학기에 내려진 것이다. 원래 교사로 일하다가 박사과정을 시작한 미국인 학생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아직도 영어가 큰 부담이 되는 나같은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네 돈을 싸들고 와서 공부해라’ 아니면 ‘공부 관두고 나가라’ 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때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학생에게 “어떻게 하실거예요? 티칭조교 신청하실거예요?” 하고 걱정스레 묻는 내게 “에이~ 농담도 잘하셔. 우리가 티칭을 어떻게 해요?” 하고 낄낄거리며 웃었고, 나도 ‘맞어맞어’ 하는 심정으로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석사과정은 짧기라도 하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박사과정 공부에 들어갈 등록금과 생활비를 내 힘으로 감당하기란 불가능했고, 부모님도 아직 학생인 동생들 때문에 내게 무리한 뒷바라지를 하실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와 함께 “농담도 잘하셔” 하던 학생은 알고보니 한국에서 꽤나 잘나가는 집안의 아들이라, 부모님으로부터 등록금은 물론이고 처자식과 함께 생활하는데 드는 비용까지도 지원을 받기로 했다고 들었다. 반면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가방을 싸야 하나… 한숨을 쉬고 있는 와중에,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친해졌던 미국인 친구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 친구는 전직 초등교사인 박사과정 학생이었는데, 남편도 조지아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어서 다른 주로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자기가 가르치던 과목을 네가 한 번 맡아서 가르쳐보라는 것이었다. 펄쩍뛰며 ‘이렇게 영어를 버벅대는 내가 무슨 강의냐고’ 하는 내게 한없이 어깨를 토닥이며 ‘그거 별 거 아니야. 한 학기만 고생하면 금방 익숙해져. 내가 가르치던 강의노트를 고스란히 줄테니 한 번 해봐!’ 하고 부추겼다. 

뒤에는 적군이 떼를 지어 쫓아오고 앞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는 그런 형상이었다고나 할까. 적군에게 잡혀 죽으나 강물에 빠져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이니 한 번 뛰어들어보자 하는 결심을 했다. 일단 강의를 시작해보고, 학생들이 내 말을 도저히 못알아듣고 못참겠으면 학과에서 나를 해고하겠지. 일단 그 때 까지만이라도 버텨보자 하고 생각한 것이다.

내 수업에 관련된 공부와 과제만 해도 엄청난데, 강의준비까지 안되는 영어로 하자니 그저 한숨과 푸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강의경력 덕분에 교수로 임용될 때 큰 덕을 보았고, 박사학위를 받는 그 날까지 내 돈 한 푼 안들이고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으니 새옹지마 라는 말이 참 깊이 와닿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2011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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