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읽다가 못 끝내고 말았다.
워낙 잘 쓴 책이라서 너무 꼼꼼하게 읽다보니(주석도 자세히 읽고, 책 뒤편 문헌의 인용도 보다 보니)
진도가 너무 늦게 나가는 까닭에 어느 순간에 책을 놓게 되었다.
다시 한번 꼭 읽어보리라. 아니 여러번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경향 신문에 난 기사를 이곳에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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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민들은 참 ‘착한’ 국민들이다. 미국의 1인당(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인구 45만명의 도시국가 룩셈부르크를 제외하고는
세계 1위이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다른 선진국 국민들보다 평균적으로 적게는 10%, 많게는 30% 더 긴 시간을 일하기 때문에
노동시간당 (구매력 기준) 소득수준은 세계 7~8위 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
산다고 믿고 지낸다.
미국은 (국민소득 대비) 복지지출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구 나라들에 비하면 반밖에 안된다. 그리고 1인당 소득이 미국의 40%
정도밖에 안되는, 한국 같은 나라 국민도 모두 가지고 있는 의료보험 혜택도 없이 사는 사람이 수천만명이나 되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못나서 그런 것이니 정부 보조를 기대하지 않고 고생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나마 있는 복지도 삭감하고 전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하는데 반대하는 공화당에 투표를 하는 국민이 많은 나라가 미국이다. 복지가
늘어나고 의료보험이 확대되면 크게 덕을 볼 저소득층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초창기에 미국은 신분제에 묶여있던 유럽보다 계층 상승이 쉬운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어느 다른 선진국들보다도 세대간 계층
이동성이 낮은 나라가 됐다. 복지가 미비해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위로 올라갈 발판이 없고, 한번 인생에서 실패하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아직도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선진국 중에서 제일 불평등한 소득분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니 도리어 미국의 역동성과 개방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믿으면서 지낸다. 이런 극심한 불평등이 사회 저변에 흐르는 갈등을 심화시켜 세계 최고의 살인율로 귀결돼도,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범죄자는 강하게 처벌하는 것이 능사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그뿐이 아니다. 레이건 정부 이후 지난 30여년간 대규모로 이루어진 규제완화와 부자감세 덕분에 미국의 소득분배는 엄청나게
악화됐다. 1970년대 말까지 미국 최상위 1%에게 돌아간 몫은 국민 소득의 10%였는데, 최근(2006년 자료)에는 무려
23%로 뛸 정도로, 가뜩이나 불평등한 소득분배가 더 불평등해졌다. 1970년대 말에 평균 임금의 30~40배 정도이던 최고경영자
평균임금은 이제는 최소한 300~400배, 논자에 따라서는 1000배까지 추정할 정도로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소득분배 악화는 세계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든가, 최고경영자의 임금이 오른 것은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최고 경영자의 중요성이 더 커졌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체제변호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항의도 별로 하지 않고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1970년대 이후 임금(중간위 기준)이 거의 오르지 않았음에도 임금을 올려달라고 파업을 하거나 자신들의 임금수준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정부 정책을 요구하기보다는 옛날보다 일을 더 하고, 더 많은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고, 급기야는 가계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를 내가면서 이러한 변화에 대처해 왔다.
더 이상 ‘착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미국 국민들의 ‘착함’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직후에 잠깐 정신을 잃고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의 의료보험
개혁을 반대했다. 일부 국민들은 의료문제에 정부가 개입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메디케어에 손대지 말라는 플래카드까지 들고
나섰다. 메디케어는 노인들을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의료보험임에도 말이다. 의료보험 확대에 반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볼
대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작년 가을 중간 선거 때에는 공식 실업률이 9%를 넘고 구직 포기자를 포함한 실업률이 16%를 넘는 상황임에도
정부 예산을 삭감하고 긴축 정책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공화당을 대거 당선시켜 주었다. 특히 중앙은행도 없애고 중앙정부도 국방,
외교 등의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는 ‘티 파티’ 출신 정치인들을 대거 선출해 이들이 지난
여름 정부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이 엄청난 보수를 받아가면서
투기를 하다가 망한 금융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티 파티’ 의원들이 부자들에 대한 증세를 결사반대하는 것을 전폭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착한’ 국민들도 참는 데 한계가 있나 보다. 3주 전쯤 소규모로 뉴욕 월가에서 시작했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 운동이 의외로 반향을 얻으면서 미국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젊은이들 위주로 진행되다가 이제는 각계각층이 참여하고 있으며, 도시마다 시위 규모는 다르지만 이미 70여개 도시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별 일도 다 있다’는 투로 무시하던 언론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오바마 대통령, 전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
등 주요 정치인들도 이 운동을 반쯤 지지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뉴욕의 블룸버그 시장 등 보수적 정치인들은 이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도리어 이 운동을 선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은 현재는 초점도 없고 조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뚜렷한 지도자도 없고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대안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하는 것은 많은 미국인들, 특히 젊은 미국인들이
지금 미국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얼마나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누구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경제
상황이 닥쳤는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워싱턴’ 내지는 ‘주류 세력’(establishment)만 탓하던 미국인들이
드디어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산업이 위기의 주범이고, 월가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미국의 미래는 없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커다란 변화이다.
이번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좀 더 시위를 하다가 흐지부지 끝날 수도
있고, 확률은 작지만 아랍 국가들에서처럼 운동이 격화돼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만일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현재 경제
상황에 불만은 많지만, 그 불만을 어디에 표출할지 몰라 ‘티 파티’로 몰려간 사람들 중 많은 수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이 상당해질 수도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내년 재선을 장담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을 이용해 금융권과 그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공세를 펴게 된다면, 이 운동 자체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미국 정치의 흐름에 상당히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난 30여년 동안 기득권층이 바라는 대로 ‘착하게’만 살아왔던 미국 국민들이 드디어 미국의 사회,
경제 시스템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 경제의 전망이 어둡고, 따라서 미국
경제의 전망도 어둡다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더 많은 미국 국민들이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될 확률이 높다.
미국 국민들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들도 그에 못지않게 ‘착하게’ 살아 왔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 우리 국민들은 OECD
회원국 중 최장 노동시간, 최고의 비정규직 비율, 최고의 남녀 임금격차, 멕시코 다음으로 소득 대비 작은 복지국가, 소득 대비
세계 1~2위를 다투는 가계부채 등을 참고 살아온 정말 ‘착한’ 국민들이다.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