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된 프린터와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느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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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구실에 있는 프린터는 내가 처음 임용되던 8년 전에 받은 것으로, 레이저젯 방식으로 출력하는, 당시로서는 제법 괜찮은 사양의 물건이었다. 크기도 아담하고, 깔끔하게 인쇄되어서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데, 이 기계가 8년을 일하다보니 이젠 조금씩 망가지면서 사용하기에 불편해지고 있었다. 종이를 잡아 올려주는 장치가 망가져서 종이가 가득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없음 경고가 뜨는가 하면, 문서 한 개를 출력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그러던 차에, 이번 학년도 비품구입을 신청하라는 공지메일이 왔길래, 이왕에 새 것으로 장만하는 것, 다른 필요한 기능도 구비된 것으로 신청을 했다. 요즘은 프린터가 컴퓨터에 케이블로 연결되지 않고 무선으로 연결되는 방식이 많아졌다. 무선 프린터라면 책상 어느 곳에 놓아도 되고, 심지어 책상 아래에 두어도 되니, 연구실 공간을 보다 잘 활용할 수 있을 듯 했다.

이번 학년도부터 프로그램 헤드라는 보직을 맡았으니, 여러 가지 중요한 공식문서를 저장할 일이 많을 듯하여, 스캐너와 복사기 기능까지 갖춘 프린터가 좋겠다 싶어 그 기능도 추가했다.

그런 모든 기능을 갖추고, 심지어 사진을 컬러로 인쇄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화질의 프린터가 불과 200-300달러 정도의 가격이니, 지난 몇 년 사이에 얼마나 기술이 진보하고, 그에 따라 가격이 내려갔는지, 참 놀라웠다.

어제 아래층 물품 구매 담당 비서에게 내려가서, 언제쯤 프린터를 받을 수 있을지 물어보았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디렉터(학과장보다 높은 보직이다)가, 컬러 프린터는 학과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연결된 복사기(겸용 컬러 프린터+스캐너+팩스기)를 사용하면 되므로, 내 신청을 기각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디렉터가 된 케나 교수는 젊고 유능하며 평소에 나와도 제법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8년된 프린터 바꿔달라고 신청한 것을 거절하다니, 이 사람이 나를 미워하나? 아니면 고작 300달러 짜리 프린터도 못 살 정도로 학과 재정이 어려워졌나? 별 별 생각이 다 들었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연구실로 돌아와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가다듬어 케나에게 이메일을 썼다. 내가 그 사양의 프린터가 필요한 이유를 담담하게 그러나 명료하게 적었다.

무선 프린터가 있으면 연구실 밖에서 회의를 하던 중간에라도 필요한 문서를 바로 인쇄할 수 있으니 일에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연구실 공간을 보다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컬러 인쇄 기능은 굳이 필요하지 않으나, 스캐너 기능이 있는 것은 죄다 컬러로만 인쇄되는 것이었다.

스캐너 기능은 왜 필요한고 하니, 학생과 연구실에서 긴밀하게 상담을 하던 중에 메모나 중요한 관련 문서를 내게도 저장하고, 학생도 원본을 가져가야 하는 일이 자주 있다. 프로그램 헤드로서, 문제 학생들과 상담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임무인데, 그럴 때마다 상담을 중단하고 연구실 밖의 복사기나 스캐너를 사용하기 위해서 왔다갔다 한다면 상담이 제대로 되지도 않거니와, 시간의 손실도 크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문제 행동을 나열한 문서라든지, 학생이 쓴 반성문 같은 것을 깜빡 잊고 외부 복사기에 방치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학생의 사생활 침해 문제도 있고, 공동 복사기는 다른 교수나 시간강사, 심지어 비서와 대학원 조교까지도 수시로 사용하는 것이라 내가 필요한 때에 바로바로 사용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렇게 상세한 이유를 다 쓴 다음에는, 그러나 재정 부족이라든지 다른 이유로 내가 신청한 프린터를 받을 수 없다면,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자원만을 활용하여 업무에 지장을 덜 주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 다만, 나의 신청을 한 번만 더 고려해주면 진심으로 고맙겠다, 하고 썼다.

그리고나서는 내년도 학회발표 프로포절을 마감 시한에 맞추어 쓰느라 바빠서 프린터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케나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연구실로 들어섰다. 손에는 내가 보낸 이메일을 프린트 한 것과, 또 다른 문서 몇 장을 들고 있었다.

알고보니, 대학교 전체 규정이 보안상의 이유로 무선 프린터를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데다, 구입할 수 있는 프린터의 기종이 아예 몇 가지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만 골라서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케나가 그 목록을 뽑아서 직접 내 연구실로 올라온 것이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무선 프린터를 금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납득이 잘 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무선 프린터를 사용해보니 정말 편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케나가 말했다. 그리고 스캐너를 사용해서 저장할 문서는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내 대답을 들은 다음 수긍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스트에 있는 스캐너 기능있는 프린터는 너무 비싼 것이라 학과 재정으로 구입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신청한 것은 고작 300달러 안쪽의 가격이었는데, 학교에서 가지고 있는 목록은 600달러가 넘는 비싼 기종이었다. 크기도 너무 커서 내 연구실에 놓고 사용하기에도 불편한 것이었다. 즉, 결론은 학교 행정부의 맹꽁한 정책 때문에, 내게 가장 적합한 사양의 프린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은 변함없이 “노우” 였지만, 케나가 일부러 내 연구실로 찾아와서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내가 잠시 가졌던 오해는 풀렸고, 케나도 아마 내가 “쓸데업이 고퀄”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용어이다 🙂 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업무상 반드시 필요해서 신청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이것이 의사소통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정보의 전달 혹은 지시의 전달일 뿐이다. “의사” 라는 것은 질문이나 요청의 근거와 이유를 포함하는 것이고, 그것을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쌍방교환을 통해 제대로 이해되도록 하는 것이 “소통” 이라고 믿는다.

프린터는 정 안되면 집에서 사용하는 것을 연구실로 가져와서 써도 되고, 아니면 스캐너 기능이 없는 것을 신청해서 그런대로 적응하며 써도 된다. 업무의 효율이 떨어져서 결국 손해보는 건 맹꽁한 정책을 고집하는 대학교 측일테니 말이다.

나는 케나와 의사소통을 잘 했고, 앞으로도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잘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기분이 좋았다. 간편하게 이메일이나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아랫층에서 내 연구실이 있는 2층까지 올라와서 얼굴을 보며 내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주려고 노력한 케나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사족:

우리 학과는 디파트먼트(Department) 라고 하는 단위보다 더 커서, 스쿨(School) 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는 체재이다. 즉, 다른 학과는 영문과 Department of English, 무용과 Department of Dance, 하는 식으로 구분되지만, 우리는 교사교육 학교 School of Teacher Education 안에 유아교육 프로그램, 초등교육 프로그램, 수학교육 프로그램, 등등 열 개가 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번 학년도부터 케나는 그 스쿨의 디렉터로 임명되었고, 나는 유아교육 프로그램의 헤드가 되었다. 우리 프로그램은 백 명이 넘는 학생과 시간강사 포함해서 십 여명의 교수, 그리고 이십 개가 넘는 과목을 관장하고 있어서 스쿨 내에서 초등교육 다음으로 가장 큰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2013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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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봉봉

안녕하세요, 소년 공원님~

게시글도 댓글도 모두 소년 공원님의 글 밖에 없던데

이렇게 댓글 다는 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네요.

(하지만 따로 방명록이 없어서 그냥 댓글 답니다…^^;;;)

전 예전에 교수님이 82자게에서 질문받기 놀이(?)를 하실 때 교수님을 알게 되어서

그 뒤로도 교수님 블로그 종종 구경하던 애독자에요.

전 교수님과는 좀 다르지만 한국에서 초등교사를 하고 있는데요,

학교라는 곳은 어떻게 보면 참 대표적으로 경직된 조직 중의 하나라 그런 것인지

한국이나 미국이나 돌아가는 모양새가 답답한 건 좀 비슷한 거 같아 재미있는 거 같아요.

문화권별로 어떤 것들은 아주 다른 색깔들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이런 느낌을 받는달까요?

 

그나저나 미국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추석이지만,

그래도 추석 시즌 즐겁게 학교 생활, 가정 생활 하셨길 빕니다. ^_^

소년공원

포도봉봉 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여기는 방명록이 없고, 이렇게 글 아래에 댓글 달아주시는 것으로 저와 커뮤니케이션 하실 수 있어요.

초등교사라시니, 종종 들르셔서 요즘의 한국 초등교육에 대해 알려주시면 제게 큰 배움이 될 것 같아요.

추석 연휴 잘 보내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