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음식 이야기는 조금, 그냥 일기같은 이야기는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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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수감사절 방학에도 김장을 했다.

김치냉장고를 구입한 이후로 해마다 추수감사절 방학은 김장을 하는 것이 연례행사였는데, 이젠 몇 년째 하다보니 요령이 생겨서 힘은 덜 들이고 결과물은 더욱 좋아지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요일에 패어팩스 한인마트까지 장을 보러 다녀왔고, 일요일은 여독으로 피곤해서 하루 쉬었고, 월요일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방학이라 집에서 조용한 시간을 틈타 배추 두 박스, 스무 포기를 절였다. 올해에는 박스 안에 든 배추가 모두 사이즈가 고르고 속이 꽉 차서 절이기가 수월했다. 어느 해에는 배추의 크기가 들쭉날쭉해서 반으로 자를지 네등분으로 자를지 애매하고, 그래서 절이는 것도 어려웠는데 올해의 배추는 모두 네등분해서 비슷한 크기로 절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여담이지만, 한국 인터넷 싸이트에 보면 시댁에서 김장을 이백포기 삼백포기 하는데, 며느리만 죽어라 일을 하고 시월드 (즉 시어머니나 시누이 등) 가족들은 놀고먹기만 해서 스트레스 받는다는 아줌마들의 글이 종종 올라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좀 과장이 아닌가 싶다. 우리 가족은 배추 스무포기만 김장을 담아도 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우리 가족이 일년 내내 먹고도 남을 정도인데, 이백포기 삼백포기를 김장을 하면 그걸 누가 다 먹는다는 말인가? 아무리 형제가 많아서 부모님 댁에 모여서 함께 김장을 하고 나눠가진다해도, 열 가족 이상이 일 년 내내 먹고도 남을 양인데 말이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학교 급식이나 배달음식 외식 등으로 집에서 김치와 함께 밥을 먹을 기회도 별로 없을텐데. 혹시, 한 “포기” 라고 하는 단위가 배추 한 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네등분으로 나누어서 절이고 버무린 한 “쪽”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배추 스무통, 네등분하니 팔십포기를 김장한 셈인가보다.

다시 김장 이야기로 돌아가서… 월요일에 절인 배추를 화요일 아침부터 건져서 씻고, 양념을 만들어서 버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없으니 넓다란 부엌과 리빙룸 마룻바닥에 김치통을 늘어놓고 마음껏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스마트폰으로 한국 티비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김치를 한창 신나게 버무리고 있는데 딩동~ 하는 벨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얼른 나가보려해도 양념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벗기가 어려워서 나가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디잉~도옹~ 하고 무언가 의사전달의 메세지가 담긴 벨소리가 난다. 방문판매원이나 기부금 모금원이나 뭐 그런 사람이라면 무미건조하게 딩동~ 하고 몇 번 벨을 울리다가 그냥 갈텐데, 이 소리는 분명히 “집안에 불이 켜진 걸 보니, 틀림없이 사람이 있군요. 그럼 꼭 좀 나와보세요!” 하는 듯이 벨을 누른 소리였다.

윗층에서 시험 채점을 하고 있는 남편을 불러서 현관으로 나가보라고 했더니, 앞집의 윌 할아버지셨다. 역시, 나의 벨소리 해석이 맞았던 것이다 🙂 도리스 여사가 손수 구운 호박파이를 추수감사절 축하 카드와 함께 주고 가셨다. 펌킨파이는 미국 추수감사절의 전통이랍니다, 하는 카드 문구를 필기체로 예쁘게 쓴 것도 도리스의 솜씨. 여든이 되어가는 아니지만 아직도 예쁜 모습에 솜씨와 말씨와 맘씨가 모두 고운 도리스는 나로 하여금 저렇게 아름답게 나이들어가야겠다 하는 다짐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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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난 번에 내가 직접 빚어서 튀긴 만두를 맛보여드렸던 것에 대한 답례로 구우신 듯 하다. 예쁜 파이 접시에 직접 만든 파이크러스트, 그리고 정말 맛있는 호박속을 넣어서 구운 파이, 그리고 그 위에 얹어서 먹으라고 생크림까지도 준비해서 가져다 주셨다.

화요일 점심즈음이 되자 김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떡 본김에 제사를 지낸다면, 김장한 김에 돼지고기 보쌈 파티를 할만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우리 학교 한국인 교수들 중에서 방학이라고 출타중인 사람들은 빼고 남은 박교수 부부를 불렀다. 나말고 어나더 닥터박인 박 모모 교수는 이번해에 새로 부임한 여교수인데, 얼마전에 아기를 임신해서 입덧을 하는 중이라 이전에도 한 두 번 내가 반찬을 만들어서 나누어준 적이 있다.

부드럽게 삶은 돼지고기를 김치에 싸서 먹고, 후식으로는 앞집에서 온 호박파이를 먹고, 영화도 한 편 함께 감상했다. 아이들도 그럭저럭 어른들이 먹고 즐기는 동안에 잘 협조를 해주어서 방학이라는 기분을 마음껏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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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교수네 부부도 우리 부부처럼, 결혼한지는 몇 해가 지났지만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잡을 때까지 아이를 미루다가 이번에 첫 아이를 임신한 경우라서, 조금 더 친근감이 들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부모가 된다는 경험을 하게 된 두 사람에게 선배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우리 부부를 예로 들자면, 아이가 없던 시절에는 늘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음악회와 영화 관람을 자주 다니고, 감명깊게 본 오페라나 영화는 감상문을 제법 길게 쓰기도 하는 반면에,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라든지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같은 아메리칸 색채가 짙은 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살았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보니, 최신 개봉작 영화는 몰라도, 우리 동네에서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를 가장 잘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어린이 박물관 입장료가 얼마이고 개관 폐관 시간이 언제인지 등을 줄줄 꿰게 되었고, 우리집 티비는 몇 년째 어린이 프로그램만 보여주는 화면이 되었다. 클래식 음악 씨디가 가득 꽂힌 진열장은 아이들 장난감 선반으로 막혀버렸고, 음악회라고는 학교에서 무료로 하는 연주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 아이들 컨디션을 봐가면서 인터미션을 틈타 빠져나오곤 하는 것이 문화생활의 전부가 되었다.

김장거리를 사러 패어팩스에 갔다가 아이들 겨울 외투를 사주려고 아울렛 쇼핑몰에 들렀을 때, 나는 또한번 우리의 (엄밀히 말하자면 남편의 🙂 변화를 경험했다. 남편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라, 군사독재문화에 대한 반발심이 무척 강하다. 물론 사회전반의 부조리나 지도층의 비리에도 나보다 훨씬 더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 라든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 같은 수사어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군대식의 상명하복 관계를 혐오해서 군대를 연상시키는 그 어떤 것이라도 가까이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팔래치아 산맥자락의 마을에서 나고 자란 코난군은 한국의 예비군복 같은 국방색 얼룩덜룩한 무늬의 옷을 “사냥꾼의 복장” 이라고 배웠고, (영어로는 케모플라쥐 라고 부른다) 이런 옷을 입고 숲속에 숨어있으면 사람도 동물도 자신을 식별하지 못하는 위장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는지, 제 옷을 사러 갈 때마다 국방색 옷이나 신발을 고르곤 한다. 아울렛 몰의 한 아동복 가게에 들어가서 나는 둘리양의 옷을 고르고 있는데, 저만치서 코난군과 아빠가 무언가 열심히 뒤적이더니 누가 봐도 예비군복 바지의 미니어쳐 같은 바지 한 벌을 골라서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멋적은 변명은, 그 바지가 코난군이 좋아하는 무늬이기도 하고 대폭 세일을 해서 무척 싼 값이라 사준 것일 뿐이라지만, 코난군이 태어나기 전의 내가 알던 남편은 누가 공짜로 그런 옷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사람이었다 ㅎㅎㅎ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 부부가 변해가는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어나더 박교수네 부부도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서 보다 더 폭넓은 인생 경험도 하고, 긍정적인 변화도 맞이하고, 그렇게 부모가 되는 공부를 시작하게 되리라 믿는다.

201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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