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시험 치르는 날을 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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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금 이 시각이면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이 밝았을 것이다.

예전 학력고사를 치르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여러 가지 전형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대학입학을 하기 때문에 수능시험에 대한 압박감이 덜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치르는 시험 중에 어찌보면 가장 큰 결과가 달려있는 시험이니 그 누가 이 시험이 별것 아니라고 코웃음칠 수 있을까.

 

어제 간단한 문서작업을 하면서 응답하라 1988 이라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대충대충 시청을 했는데, 오늘은 인터넷 기사마다 수능시험에 대한 글을 보다보니 아주 오래전에 내가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1972년생 쥐띠이지만 2월생이라서 1971년생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따라서 나의 첫 학력고사는 1989년 12월이었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를 보니 마침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꼭 그 시절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1989년 11월, 아마도 지금 이맘때 쯤이었던 것 같다.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응시 지원서를 직접 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접수를 했던 것이.

어린이였을 때 서울 친척집에 놀러갔던 일 이후로 처음 가보는 서울이라 약간은 긴장도 되고, 또 약간은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그 당시 대학입학 제도는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에 단 한 번만을 지원해야 했는데, 11월에 원서 지원을 먼저 하고, 12월에 지원한 대학교에 마련된 고사장으로 가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 살면서 어느 정도 공부 잘 하는 여고생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는 곳과 가까운 국립대학교 사범대에 지원하는 경우가 흔했다. 집에서 통학하면 추가로 들어가는 생활비가 없고,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저렴한 등록금은 물론이거니와 졸업 후 취업도 무난하기에,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에 무리가 없었을게다. 

하지만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대신에 나는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교에 지원을 하는 터라,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한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고, 전형적인 경상도 사고방식의 집안 어른들로부터 우려를 듣기도 했다. 나보다도 훨씬 더 공부를 잘 하는 남동생이 있는데, 그 아이를 서울 유학보내려면 누나인 나는 집에 남아서 학비 저렴한 국립대를 "얌전히" 다니는 것이 살림밑천 맏딸로서의 도리가 마땅한 것이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였다.

 

그 누구도 꺾지 못할 우리 엄마의 나를 향한 무한한 지원과 고집 덕분에 나는 마침내 12월 며칠이던가? 이화여대 사범대 건물에서 학력고사를 치루었다. 하지만 그 해 수학 시험이 너무 어려웠고, 특히나 수학이 취약하던 내 점수로 그만 낙방을 하고 말았다.

1년간 재수를 하면서 모의고사 점수는 많이 올렸지만, 나의 목표는 여전히 같은 학교 같은 학과였다.

그래서 1990년 12월에 같은 고사장에서 또 학력고사를 치루었는데, 그 때는 합격을 해서 그랬는지, 두 번째 치른 학력고사가 더욱 또렷이 기억이 난다 🙂

 

부산에 비하면 무척 추운 날씨였지만 고사장 안에는 스팀으로 가동하는 히터가 아낌없이 돌아가서 따뜻하다 못해 후덥지근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험 감독을 하시던 교수님은 나중에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교육철학 수업을 들었던 분인데, 목소리가 무척 낭랑하면서도 무섭게 단호해서, 시험 중간에 누군가가 고개만 살짝 돌린다 싶어도 "어허~ 어딜 고개를 돌려요! 자기 시험에 집중하세요!" 하고 야단을 치셨고, 그 때문에 어떤 학생은 심하게 긴장해서 시험을 망쳤다며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나오면서 막 울기도 했었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입실해서 도시락을 먹어가며 시험을 모두 마치고 나오니 다시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입시생들은 부모님들이 마중나와서 고생많았다며 위로해주곤 했는데, 친척집에서 머물던 나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혼자서 전철을 타고 혼자서 다녔다. 하지만외롭다거나 처량하다는 생각보다는, 나는 이렇게나 성숙한 어른이야! 하는 자부심을 더 많이 가졌던 것 같다.

 

(퇴근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잠시 중단)

(다음날 이어서 씀 🙂

 

시험 전날에 있었던 예비소집일이나, 합격자 발표가 난 다음에 받아야했던 신체검사 같은 날에도 이화여대를 가야 했는데, 말로만 듣던 이화여대를 구경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오래된 석조건물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마치 여대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보기도 하고, 학교 앞의 분식점에서 점심을 사먹기도 하고, 머리핀 같은 소품을 파는 가게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 당시 부산에 있는 우리집과 서울에 머물렀던 친척집이 각기 부산과 서울의 고속터미널과 가까워서 기차보다는 고속버스를 주로 이용했는데, 고속버스 안에서는 워커맨으로 음악을 듣고, 휴게소에서는 일회용 그릇에 담긴 어묵을 사먹었던 것도 기억난다. 언젠가 한 번은 무슨 경품에 당첨된 적도 있었는데, 그냥 귀찮아서 당첨안된 척 하고 눈을 감고 자는 척 하고 있었는데, 그게 결국은 엉터리 사기 상술이라는 것을 알고 다행스러워 하기도 했다.

 

무척이나 넓었던 광화문앞 거리, 부산의 가로수보다 훨씬 커보였던 가로수, 장갑과 모자와 목도리가 패션소품이 아니라 정말로 방한용품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추운 겨울 날씨…

1980년대를 마감하던 그 시절 서울의 모습이 아련하게 생각난다.

 

2015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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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silk

안녕하세요 소년공원님

글 내용이  저의 이야기랑 많이 비슷해 저 또한 많은 추억을 되새기게 됩니다

전 81학번 이대 사범대 교육학과 초등교육전공  이고 역시 부산대 사범대를 가려다 

서울로 온 케이스라 친구들로부터 은근한 시샘을 받았었죠

정문에서 교육학관까지 가려면 정말 멀어 우리땐 그 길을 골고다의 언덕이라고 불렀구요

제가 다닐당신 교육학과 안에 교육학전공 초등교육전공 유아교육전공이 들어있어

이 세 전공이 섞여 수업도 같이 받았지요

저 역시 소년공원님이 사시는 명왕성 못지않은 미 중남부 소도시에 살아

큰 한인마켓을 가려면 3시간은 달려 줘야 해요

치열하게 열심히 노력하셔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모습과 두 자녀를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 하는 모습에 항상 감동받고 있어요

반가운 마음에 제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어요

 

 

소년공원

와, 81학번 선배님이라니, 반갑습니다!

게다가 미국 동남부 시골에 사시는 것도 저와 비슷해서 더욱 반갑구요.

 

이대 정문에서 휴웃길 지나서 학관을 끼고 골고다 언덕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야 교육관 건물이 나왔죠. 오히려 후문과 북문이 훨씬 더 가까웠어요. 그 골고다 길이 도로포장도 제대로 안되어서 제가 입학하고 나서도 비오는 날에는 질퍽거리곤 했어요. 반면에 음대 미대 법대 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넓고 포장도 잘 되어 있어서, 우리끼리 사범대는 찬밥이야… 하고 자조하기도 했죠 🙂

2009년 겨울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친구들과 만나느라 이대 캠퍼스를 가봤는데, 너무 많이 변했더군요. 이화광장과 휴웃길의 그 정취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근사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는데,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옛날의 그 정취가 없어져서 섭섭했어요.

참, 님도 부산대 대신에 이화여대를 가셨으니 혹시 기숙사 생활은 안하셨나요?

네 명이서 한 방을 쓰고 공동 세면실과 화장실이 있던 그 기숙사 건물…

제가 졸업하고 얼마 안있어 새 기숙사를 지었더군요.

제가 졸업하고도 학교 부속기관에서 근무를 해서, 잘 알죠 🙂

 

암튼, 자주 들러주시고 안부 전해주세요.

기회가 되면 직접 만나뵙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