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영국에서 출판된 어린이 소설이 1964년 미국 월트디즈니 사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 메리 포핀스는 나중에 영국에서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열연했던 줄리 앤드류스가 메리 포핀스 역을 맡았는데, 돌풍이 부는 어느날 우산을 낙하산 삼아 하늘에서 날아온 다음, 마이클과 제인 남매에게 더없이 좋은 가정교사가 되어준다. 엄격하기만 한 아빠와 늘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고 함께 모험을 즐기기도 하는데, 제인과 마이클의 아빠가 이제부터는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고 뉘우치는 순간, 또 돌풍이 한차례 불고, 메리 포핀스는 그 바람을 타고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며 영화가 끝난다.
지난 10월 초, 학교일과 아이들 보살피는 일에 치어서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나의 구원요청에 아버지는 마치 바람을 타고 날아온 메리포핀스 처럼 갑자기 미국까지 날아오셨다.
내가 전화로 좀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 9월 말이었고, 아버지가 도착하신 것이 10월 3일이었으니, 정말로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한국에서 미국행이 아니라, 이웃 마을 다니러 오신 듯, 그렇게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서 지난 두 달 동안 코난군의 등하교 스쿨버스 태우고 내리기를 도와주셨다.
아침에 남편이 새벽같이 출근하고나면 나 혼자서 내 출근준비 하랴, 두 아이들을 채근해서 등교준비 시키랴, 도시락과 기타 준비물을 챙기느라 바쁜데, 그 와중에 아이들이 무언가 심사가 뒤틀려 칭얼거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다 집어던지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오신 뒤로, 코난군의 갖가지 준비물을 챙겨주시고, 오늘 쓰고갈 모자를 고르게 한다든지, 입고갈 외투를 고르게 한다든지, 삐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시는 등등, 코난군의 등교 준비를 완벽하게 해주시니, 나는 둘리양 등원 준비와 내 출근 준비만 하면 되어서 아침 시간이 무척 여유롭고, 아이들도 엄마가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주니 좋았다.
코난군이 하교하는 버스 정거장에도 시간 맞춰 나가서 마중해주시고, 집에 오면 숙제를 도와주시기도 하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주시거나, 차고와 베란다를 깨끗하게 청소해주시고, 심지어 유리창도 닦아주셨다.
주말이면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도 하고, 코난군의 학교 행사에 구경을 함께 가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날…
메리 포핀스 영화의 막바지 처럼, 우리에게 또 한 차례 돌풍이 불었으니…
날씨가 추워지면서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시고 말았다.
열은 없지만, 기침과 콧물과 가래가 계속되어서 힘들어 하셨는데, 미국에서 의료보험이 없이 병원에 갔다가는 병원비 폭탄을 맞을 것이 분명하고, 또 의사를 만나보았자 항생제나 처방해줄 뿐, 한국의 병원에서 하는 것처럼 주사를 놓아주거나 링거를 맞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으니, 병에 큰 차도를 보기가 어렵다.
아침마다 자몽과 오렌지를 짜서 비타민 씨가 풍부한 쥬스를 만들어 드리고, 콧물과 가래를 줄여주는 오버더 카운터 (처방전 없이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약을 드시게 하고, 가습기를 틀어드렸지만, 감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싹 없어지는 병이 아니니,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히터를 튼 따뜻한 방 안에서 하루종일 아이패드로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 밖에 없었다.
추수감사절 휴일 동안에도 외출 한 번 못하고 꼼짝없이 집안에만 갇혀계시던 아버지가 마침내, 비행기표를 바꿔서라도 한국에 일찍 돌아가시고 싶다고 하셨다. 한국에 가면 진료비 몇 천원만 내고 의사를 만나볼 수도 있고, 또 아직 증세가 심하지 않은 지금 돌아가야 비행기를 장시간 타고 견디는 것도 쉽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다.
비행기표를 알아보니 원래 예약되어있던 12월 30일 출발을 12월 3일로 바꿀 수가 있다고 해서, 얼떨결에 바꾸고 보니 아버지와 함께 있을 날이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어차피 언제고 한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이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우리곁을 떠나신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고, 그 동안 잘 못해드린 것만 자꾸 떠올라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니 메리 포핀스가 갑자기 바람을 타고 사라진 것처럼, 아버지와도 이렇게 예정하지 못했던 시간에 갑자기 헤어지게 되는 것이 덜 슬프고 좋은 추억만 남기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세상에 수많은 이별 중에서, 이렇게 덜 슬픈 이별도 드물게다.
아버지가 아직은 정정하신 모습으로 (감기에 걸리긴 했어도), 우리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열 네 시간 거리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실 수 있으니, 또 한국으로 가신 다음에도 서로 화상전화로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언젠가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으니, 내 상상력으로 지어낼 수 있는 온갖 슬픈 이별 장면에 비하면 이건 하나도 슬프지 않은 이별이다.
(전쟁고아라든지, 불치병에 걸려서 돌아가신 분들, 남북이산가족 상봉 후에 다시 이별하는 장면… 등등 내 상상속에 등장하는 모든 분들께 죄송하고 감사하단 말씀을 전한다… ㅎㅎㅎ)
메리 포핀스 영화 중에서 설탕 한숟갈 이라는 노래가 나온다.
코난군도 그 멜로디와 가사를 좋아해서 처음 듣던 순간부터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던 노래인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 거기에 재미 라는 요소를 추가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낼 수 있다는 가사가 마음에 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vLkp_Dx6VdI
이제 아버지가 가시고나면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2주 간은 또 아침 저녁으로 동동거리며 아이들을 챙겨야 하고 출퇴근을 해야 하지만…
겨울 방학이 끝나면 또다시 아버지가 다니러 오시기 전의 그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맞벌이로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 이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설탕 한 스푼을 더해서 알약을 삼키듯, 무언가 즐거움을 찾아서 내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2015년 11월 30일
스푼풀 오브 슈거, 저도 좋아하는 노래예요. 메리포핀스와 사운드오브뮤직을 제 인생의 영화로 꼽는데, 특히 아이 낳고 보니 두 영화 속 아이들의 정서를 더 공감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듯해요. ㅎ
저도 땡스기빙 때부터 어젯밤까지 오랜만에 찾아온 감기 때문에 고생하다가 오늘에서야 드디어 해방되었네요. 아버님 잘 보내드리고 온 가족 건강히 겨울 나시기를 바랍니다. ^^
감기로 고생하셨군요?
이젠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미국에서는 감기에 걸리면 의사를 만나느니, 그냥 자가요법으로 셀프치료하면서 이겨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인 것 같아요.
의사랑 만날 약속 잡으려면 며칠 걸리고…
만나봤자 면봉으로 목구멍 한 번 긁어서 검사하고, 그 검사 했다고 진료비에 검사비가 왕창 붙어서청구되고…
검사해봤자 항생제 처방 아니면 바이러스성 질환이니 항생제도 소용없다며 그냥 보내기 일쑤…
그렇더라구요 ㅎㅎㅎ
케이티 님도 답답한 미국 병원이나 공공기관 많이 경험하셨죠?
(그냥 동지의식이 느껴져서요 🙂
하..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적겠습니까마는…….
오늘도 그랬어요 ㅡㅡ;; 담주 월요일에 아이 KT 때문에 대학병원에 정기검진 가야 하는데, 메디케이드로 커버되는 교통편 예약하느라 꼬박 20분을 통화했어요. 매번 하는 건데도, 매번 20분씩 잡아 먹으니 미칠 노릇이에요.
그나저나, 무엇이 이리 오고 있는 중일까요…?
저는 사실 논문을 부쳐달라고 말씀드려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말이죠 ㅋㅋ
예전 글 보다가 나왔던가, 암튼 어떻게 알게 된 건데, 박사 논문을 헤드스타트 관련 내용으로 쓰지 않으셨어요? 제가 헤드스타트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거든요. 어떤 내용인가 좀 더 찾아보고서 관심이 더 가면 논문 한 권 받아볼까 했었어요 ㅋ
어~허!
박사논문은 며느리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문서라는 걸 아직 모르시나요?
ㅎㅎㅎ
너무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못하는 게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게, 저뿐만 아니라 박사 공부 함께 하던 친구들의 공통된 의견이어요. 아마 산이 아빠가 논문 쓰게 되면 실감하실 겁니다 🙂
그도 그럴 것이, 연구라는 걸 처음 해보고, 그걸 처음으로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쓰는 거니, 당연히 서투르고 못났고 부끄러운 결과물인거죠.
암튼, 헤드스타트에 관심이 많으시다니 반갑네요.
혹시 지금 공부하러 다니는 곳이 이븐스타트 프로그램 아닌가요?
얼리헤드스타트도 있고…
헤드스타트는 정말 공부할 것이 많은 프로그램이예요.
여기 가보시면 읽을거리가 많아요.
http://www.acf.hhs.gov/programs/ohs/reports
여기도 헤드스타트 관련해서 좋은 페이지이구요.
http://www.zerotothree.org
보내주신 소포 오늘 잘 받았어요!
생일잔치용 배너(!!)를 보내주시는 걸까, 뭘까 궁금했는데
세상에 웬 아이 옷을 이렇게나 보내셨어요.
저희는 아이 겨울 점퍼 딱 한 벌 작년에 산 것 빼곤 새로 사는 옷이 없어요. 다 이렇게 저렇게 받아서 입거나 굿윌에서 사다 막 입고 버리죠. 보내주신 점퍼 중에 아이가 보자마자 좋다며 당장 입겠다고 손에서 놓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올해 입고 다른 건 두었다가 천천히 입히면 되겠더라고요. ㅎㅎ 감사합니다. 고이고이 잘 입힐게요. 손으로 눌러 쓰신 편지도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제 글과 제 생활을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또 귀한 시간 귀한 물건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유, 너무 약소해서 부끄러워요.
그래도 선물받은 옷이라서 아무렇게나 처분하기는 아깝더라구요.
임자를 잘 만나서 좋은 곳으로 보내니 저도 기뻐요.